▲맥도날드 1호점의 남자 마네킨과 메뉴홍은택
1호점의 메뉴판을 보면 딱 9가지만 적혀 있었다. 햄버거 15센트, 치즈버거 19센트, 프렌치 프라이즈 10센트, 밀크 10센트, 루트비어 10센트, 오렌지주스 10센트, 코카콜라 10센트, 커피 10센트, 밀크셰이크 10센트
1955년의 15센트를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3년 가격으로 환산하면 98센트. 세트메뉴가 아닌 햄버거 가격이 지금도 1달러 안팎이니까 49년 동안 같은 가격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당시 다른 햄버거에 비해 20센트나 쌌다. 절반 가격도 안 됐다는 얘기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생김으로써 노동자 가정도 비로소 외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축복일 것 같은 놀라운 가격안정은 바로 노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의 시도는 서비스 산업에서도 노동 특히 기술력 있는 노동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길을 열었다. 언제나 누구나 기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물건이 나오고 서비스가 마무리됐다. 사람은 가만히 있고 물건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였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조립 공정이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열었다고 하면 맥도날드의 스피디 시스템은 값싼 서비스와 함께 저임금 시간제 노동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일만 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Work does not work)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는 직업들이 속출했다.
레딩씨는 이 박물관이 기술적으로 1호점이 아니라 9번째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말했다. 1호점 간판을 보면 이미 1백만 개의 햄버거를 팔았다고 써있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번창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이미 8개의 지점으로 뻗어나간 상태에서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를 찾아간다.
이유는 맥도날드 형제가 멀티 믹서를 8대나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티 믹서 주문의 감소에 고민하던 크록은 믹서가 8대나 필요할 만큼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을 보러 갔다가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의 잠재적 가치에 눈을 떴다. 맥도날드 형제들을 설득해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우기로 하고 1호점을 내기에 이른 것. 크록은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매출액의 1.5%를 자신이 갖고 그 중 0.5%를 맥도날드 형제에게 나눠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맥도날드 형제는 빨리 현금화하고 싶은 욕심에 61년 270만 달러를 받고 맥도날드 햄버거 프랜차이즈에 대한, 상표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크록에게 팔았다. 세금을 제외하고 맥도날드 형제 두 사람은 각각 1백만 달러를 가져갔는데 만약 팔지 않고 그 권리를 그대로 갖고 있었으면 매년 1억8천만 달러를 가져갈 수 있었다. 반면 월급대신 받은 주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크록의 여비서 준 마티노는 맥도날드사의 주식을 10%나 보유한 억만장자가 돼서 은퇴했다.
크록은 자금 형편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맥도날드 형제에게 270만 달러를 지급하기 위해 빚을 끌어다 썼다가 2000만 달러가 넘는 금융 부담을 졌다. 평소부터 재주는 자기가 다 부리고 맥도날드 형제는 앉아서 돈만 챙긴다고 감정이 안 좋았던 크록은 복수를 꾸미게 된다. 맥도날드 형제는 맥도날드에서 손을 뗀 뒤에도 샌 버나디노의 원래 자리에서 맥도날드라는 상호 대신 '빅 엠(Big M)'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크록은 버젓이 맞은 편에 맥도날드 체인점을 냈다. 마치 한국의 낙지집끼리 벌이고 있는 원조 집 분쟁과 같다. 결과는 원조 집의 참패. 사람들의 발길은 '빅 엠'이 아니라 맥도날드로 몰렸다. '빅 엠'은 고전하다가 닐 베이커 체인점으로 바뀌었고 결국 72년 건물 자체가 철거되는 비운을 겪는다.
74년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역시 어떤 장사를 해도 영업이 안돼 다시 철거의 위기를 맞았을 때 레이 크록 만큼 야심찬 식당 프랜차이즈의 주인인 일본계 미국인 앨버트 오쿠라씨가 나타났다. 멕시칸 치킨 전문 프랜차이즈인 후안 포요(Juan Pollo)를 운영하는 오쿠라씨는 이 건물을 사무실 겸 맥도날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
맥도날드사는 당연히 이 박물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 개관 축제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데스 플레인즈의 박물관을 1호점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데스 플레인즈 박물관을 따로 성대하게 꾸민 것은 아니다. 박물관은 지상층의 주방에 이어 지하실로 이어졌다. 창고로 쓰이던 지하실은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좁았다. 사진 몇 점과 맥도날드사의 선전 비디오 테이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매출 400억 달러 맥도날드의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규모였다.
레딩과 크록은 무엇이 달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