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된 맥도날드 1호점을 가다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3] 레이 크록과 존 레딩의 엇갈린 삶

등록 2004.08.08 23:30수정 2004.08.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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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기자 주

"들어와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맥도날드 1호점은 반들반들한 유리로 밀폐돼 있었다. 바깥에서 한번 둘러보고 가는 건줄 알았는데 건물 옆쪽에 철문이 있고 철문을 열자 면접관처럼 존 레딩(56)씨가 무거운 철제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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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이 짙고 눈매가 깊어서 중세의 고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레딩씨는 맥도날드사가 1호점을 원형대로 복원해 만든 박물관의 한 사람밖에 없는 직원이다. 여름인데도 검은 색 콤비에 흰색 셔츠를 받쳐입은 그를 보면 맥도날드 역사에 권위가 있는 학자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맥도날드사의 창업자 레이 크록의 개인사에 관해 나지막한 음성으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그의 말은 간결하고도 명쾌했다.

하지만 그의 직책은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이다.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는 관람객들에게 그의 말은 언제나 "들어와요"로 시작해서 관람객이 나가면 "또 오세요"로 끝난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지금은 세계 121개국에 3만1129개 점포를 두고 있는 맥도날드사가 처음 점포를 낸 1호점의 내실이다.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은 자신의 집이 있었던 알링턴 하이츠(Arlington Heights)와 사무실이 있었던 시카고의 중간 지점이었던 데스 플레인즈(Des Plains)에 1955년 4월15일 프랜차이즈 개념의 점포를 처음으로 냈다.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

a 맥도날드 1호점의 경비원인 존 레딩씨

맥도날드 1호점의 경비원인 존 레딩씨 ⓒ 홍은택

햄버거 고기 굽는 냄새가 나지 않는 햄버거 가게는 수술실과 같다. 동시에 5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멀티 믹서와 탄산음료수를 담은 큰 통, 간 소고기를 굽는 그릴 등 모든 장비의 표면은 병원 장비처럼 회색 스테인레스로 처리돼 있고 바닥은 티끌 하나 없는 타일이 깔려 있다. 조명은 하얀 형광등. 크록의 4대 신조인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QSC & V) 중 청결 만큼은 확실히 지켜지다 못해 마치 살균 소독까지 돼 있는 듯하다.


레딩씨는 "모든 장비가 실제로 84년까지 쓰던 것들이었다"서 "특히 멀티 믹서는 당시 프린스 캐슬사로부터 믹서판매 독점권을 얻었던 창업자 크록이 직접 쓰던 것"이라고 말했다. 마네킨으로 만들어진 남자 종업원들도 조리사들이 쓰는 하얀 모자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여자 종업원은 없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햄버거는 미국에서 떡볶기 오뎅과 같은 식품이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19세기 고기를 갈아서 부쳐 먹는 게 유행이었다. 이것이 미국에 건너와서는 20세기 초 빵과 결합돼 햄버거로 탄생했다. 하지만 '빈자(貧者)의 음식'으로 치부됐다. 쓰고 남은 소고기를 갈아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는 팔지 않았고 공장주변의 좌판에서나 팔았다. 옛날 영등포 공장 벽에 '구루마'를 대고 큰 프라이팬에 떡볶이를 팔던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된다.


첫 햄버거 체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은 1920년대 햄버거에서 불량식품의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 주력했다. 사람들이 직접 보는 앞에서 그릴에 고기를 구웠고 고기는 하루에 두 번 배달되는 신선육이라고 선전했다. 이미 그 때부터 종업원의 외관에 대한 기업의 통제가 시작됐다.

화이트 캐슬이 1931년에 정한 23가지 종업원 수칙은 첫째 모자가 항상 머리를 덮어야 한다. 둘째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손질해야 한다에서 시작해 여섯 번째 이빨을 닦아야 한다, 아홉 번째 구취를 없애야 한다, 열세 번째 체취가 안 나야 한다를 거쳐 스물세 번째 바지자락이 길 때는 끝을 접어올려야 한다로 끝난다.

햄버거가 급속히 퍼진 배경에는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자동차 여행 중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특히 자동차가 대량 보급되는 시기에 개발되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등 캘리포니아 남부를 중심으로 드라이브인 (Drive-in)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4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에는 이미 1백만 대의 차들이 다녔다. 이 수치는 41개 주 전체의 차량보유 대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식당이 건물 창구를 통해 손님의 주문을 받는 것과 달리 드라브인 식당은 손님들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으면 종업원들이 찾아와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배달했다. 드라이브인 식당들은 손님들을 끌기 위해 주로 짧은 치마를 입은 10대 소녀들(carhops)을 종업원으로 고용했다. 햄버거 맛 때문인지 10대 소녀들 때문인지 드라이브인 식당은 한 때 번창했지만 10대 소녀들을 꼬시러 온 소년들의 푼돈을 노리며 장사를 지속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라치드와 모리스(맥) 맥도날드 형제도 1937년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 이런 식당을 열었다. 얼마 안 있어 샌 버나디노로 옮겨서도 같은 방식으로 장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11년쯤 하고 난 뒤인 48년 한 식당에 오래 붙어있지 않는 10대 소녀들에 빌붙어서 장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식당 문을 닫았다. 3개월 뒤 새로 식당을 열었을 때는 10대 소녀들 대신 남자 종업원만을 채용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차를 세우고 창구로 와서 주문을 하도록 했다.

처음엔 손님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종업원이 오지 않는다고 클랙슨을 빵빵 울려댔다. 맥도날드 형제가 이처럼 손님들한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변화가 받쳐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리속도를 높이고 가격을 낮추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예전의 메뉴에서 가짓수를 1/3로 줄였다. 나이프와 숟가락 포크도 없앴다. 접시와 유리컵도 종이접시와 종이컵, 그리고 종이 봉지로 바꿨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햄버거를 굽는 사람은 햄버거만 굽도록 한 것(그릴맨). 마찬가지로 햄버거에 드레싱을 바르는 사람은 드레싱만 바르도록 했다(드레서). 주문받는 사람은 주문만 받고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사람은 밀크셰이크만 만들었다(셰이커). 프라이즈(감자 튀김)를 튀기는 사람은 프라이즈만 튀겼다(프라이 맨). 처음으로 공장의 일관 작업(assembly line)이 식당의 노동 분업에 적용된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는 이를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이라고 명명했다.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a 맥도날드 1호점의 남자 마네킨과 메뉴

맥도날드 1호점의 남자 마네킨과 메뉴 ⓒ 홍은택

1호점의 메뉴판을 보면 딱 9가지만 적혀 있었다. 햄버거 15센트, 치즈버거 19센트, 프렌치 프라이즈 10센트, 밀크 10센트, 루트비어 10센트, 오렌지주스 10센트, 코카콜라 10센트, 커피 10센트, 밀크셰이크 10센트

1955년의 15센트를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03년 가격으로 환산하면 98센트. 세트메뉴가 아닌 햄버거 가격이 지금도 1달러 안팎이니까 49년 동안 같은 가격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당시 다른 햄버거에 비해 20센트나 쌌다. 절반 가격도 안 됐다는 얘기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생김으로써 노동자 가정도 비로소 외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축복일 것 같은 놀라운 가격안정은 바로 노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의 시도는 서비스 산업에서도 노동 특히 기술력 있는 노동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길을 열었다. 언제나 누구나 기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물건이 나오고 서비스가 마무리됐다. 사람은 가만히 있고 물건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였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조립 공정이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열었다고 하면 맥도날드의 스피디 시스템은 값싼 서비스와 함께 저임금 시간제 노동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일만 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미국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Work does not work)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는 직업들이 속출했다.

레딩씨는 이 박물관이 기술적으로 1호점이 아니라 9번째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이라고 말했다. 1호점 간판을 보면 이미 1백만 개의 햄버거를 팔았다고 써있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번창해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이미 8개의 지점으로 뻗어나간 상태에서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를 찾아간다.

이유는 맥도날드 형제가 멀티 믹서를 8대나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티 믹서 주문의 감소에 고민하던 크록은 믹서가 8대나 필요할 만큼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을 보러 갔다가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의 잠재적 가치에 눈을 떴다. 맥도날드 형제들을 설득해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우기로 하고 1호점을 내기에 이른 것. 크록은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매출액의 1.5%를 자신이 갖고 그 중 0.5%를 맥도날드 형제에게 나눠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맥도날드 형제는 빨리 현금화하고 싶은 욕심에 61년 270만 달러를 받고 맥도날드 햄버거 프랜차이즈에 대한, 상표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크록에게 팔았다. 세금을 제외하고 맥도날드 형제 두 사람은 각각 1백만 달러를 가져갔는데 만약 팔지 않고 그 권리를 그대로 갖고 있었으면 매년 1억8천만 달러를 가져갈 수 있었다. 반면 월급대신 받은 주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크록의 여비서 준 마티노는 맥도날드사의 주식을 10%나 보유한 억만장자가 돼서 은퇴했다.

크록은 자금 형편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맥도날드 형제에게 270만 달러를 지급하기 위해 빚을 끌어다 썼다가 2000만 달러가 넘는 금융 부담을 졌다. 평소부터 재주는 자기가 다 부리고 맥도날드 형제는 앉아서 돈만 챙긴다고 감정이 안 좋았던 크록은 복수를 꾸미게 된다. 맥도날드 형제는 맥도날드에서 손을 뗀 뒤에도 샌 버나디노의 원래 자리에서 맥도날드라는 상호 대신 '빅 엠(Big M)'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크록은 버젓이 맞은 편에 맥도날드 체인점을 냈다. 마치 한국의 낙지집끼리 벌이고 있는 원조 집 분쟁과 같다. 결과는 원조 집의 참패. 사람들의 발길은 '빅 엠'이 아니라 맥도날드로 몰렸다. '빅 엠'은 고전하다가 닐 베이커 체인점으로 바뀌었고 결국 72년 건물 자체가 철거되는 비운을 겪는다.

74년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역시 어떤 장사를 해도 영업이 안돼 다시 철거의 위기를 맞았을 때 레이 크록 만큼 야심찬 식당 프랜차이즈의 주인인 일본계 미국인 앨버트 오쿠라씨가 나타났다. 멕시칸 치킨 전문 프랜차이즈인 후안 포요(Juan Pollo)를 운영하는 오쿠라씨는 이 건물을 사무실 겸 맥도날드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

맥도날드사는 당연히 이 박물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 개관 축제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데스 플레인즈의 박물관을 1호점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데스 플레인즈 박물관을 따로 성대하게 꾸민 것은 아니다. 박물관은 지상층의 주방에 이어 지하실로 이어졌다. 창고로 쓰이던 지하실은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 좁았다. 사진 몇 점과 맥도날드사의 선전 비디오 테이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매출 400억 달러 맥도날드의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규모였다.

레딩과 크록은 무엇이 달랐나?

a 맥도날드 1호점의 외부 전경. 왼쪽 위에 있는 사진이 창업주 레이 크록

맥도날드 1호점의 외부 전경. 왼쪽 위에 있는 사진이 창업주 레이 크록 ⓒ 홍은택

그리고 일주일에 사흘만 연다. 목금토. 관람시간도 목금은 오전 10시 30분에서 오후 2시 30분. 토요일에는 4시 30분까지 2시간 더 개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5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째 주까지 여름에만 개장한다. 박물관 개장 시간은 정확히 레딩씨의 노동시간이다. 레딩씨는 시간당 11달러를 받는다. 최저임금인 5달러15센트보다 조금 더 받는 수준이며, 맥도날드의 일반적인 종업원들에 비해 많은 편이지만 노동시간이 턱없이 적다. 일요일 다른 곳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시간까지 쳐서 그의 주당 노동 시간은 20시간 안팎이다.

빠지지 않고 꼬박 일한다고 해도 한달 수입은 1000달러가 안 된다. 그 중 방 한 칸짜리 집세로 650달러가 나간다. 과거에는 엥겔계수라고 해서 수입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졌지만 요즘에는 집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수입의 30%를 넘으면 생활이 어려운 것으로 간주한다. 주 정부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보태서 그의 표현대로 부양가족이 없기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산다.

그의 일과는 판에 박은 듯하다. 항상 길 맞은 편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고 퇴근하고 퇴근한 뒤 그가 즐길 수 있는 여가는 텔레비전 시청밖에 없다. 그와 크록은 고향이 같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크 파크(Oak Park)다. 그와 크록은 학교도 같은 데를 다녔다. 오크 파크 리버 포레스트 고교다. 물론 나이가 44살이나 차이 나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가방 끈이 더 긴 쪽은 레딩씨다. 그는 고교를 졸업했고 크록은 고교 2학년에서 중퇴했다.

그는 캔자스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육군에 입대한 크록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크록은 같은 일리노이주 출신인 월트 디즈니와 같은 부대의 의무병으로 1차 대전에 복무했다. 그리고 재즈 뮤지션으로 커리어를 모색하다 실패하고 세일즈맨으로 미국을 떠돌아다녔다. 반면 레딩은 캔자스의 사우스웨스트 벨이라는 큰 전화회사에 취직해 17년간 자재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크록은 52세의 나이에 맥도날드 형제를 만나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포착했다. 레딩은 5년 전인 51세에 맥도날드 박물관의 경비원이 돼 맥도날드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뒤늦게 영문학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레딩의 인생 유전은 이렇다. 1990년 부인과 이혼한 뒤 부모님이 있는 고향 근처로 오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하지만 그 때는 경기가 안 좋을 때라서 사무직을 구할 수 없어 야채 배달, 리무진 운전 등 다종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리무진 운전은 수입은 좋았지만 하루에 20시간, 일주일에 6일을 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경비원 직은 보수는 낮아도 안정된 직장으로 보여 취직했다. 하지만 무릎 관절염이 도진 탓에 지난해 11월 경비원 직에서마저 해고됐다가 이번 여름을 앞두고 다시 맥도날드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여름이 지나면 또다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산다.

그는 서류상으로는 맥도날드사의 직원은 아니다. 인력파견업체인 인터 테크 그룹 소속이다. 달리 말해 맥도날드는 회사의 발상지격인 박물관의 하나 밖에 없는 직원조차 파견업체에서 받아 쓸 만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신분은 그렇지만 교육은 맥도날드에서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래도 지금까지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모토롤라, 스피고트 캐딜락, 맥도날드와 같은 굴지의 회사에서만 일했다. 어떤 회사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어떤 게 좋다 나쁘다 말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직업은 건물의 앞을 지키게 돼 있지, 건물 안을 들여다 보게 돼 있지 않다.

크록과 무엇이 달랐기에 인생의 차이가 그렇게 벌어졌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마디로 '세일즈맨십'이라고 말했다. 크록은 그게 있었고 자신은 없었다는 것. 세일즈맨십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맥도날드 형제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세상에 알려진 뒤 숱한 사람들이 맥도날드 형제에게 같이 사업해보자고 제안했지만 결국 그들을 설득한 사람은 크록이었다는 것.

세일즈맨십이 없어서 크록과 같은 큰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없어서 한 달에 1000달러도 벌지 못하는 시간제 저임금 노동자가 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다운사이징을 통해 중간관리층이 엷어지면서 시간제 저임금 노동자로 내려온 미국의 많은 화이트 컬러들이 마주치고 있는 현실이다.

a 맥도날드 1호점 지하 전시관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바살로씨와 그녀의 시어머니

맥도날드 1호점 지하 전시관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바살로씨와 그녀의 시어머니 ⓒ 홍은택

박물관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지하실에서 만난 올스테이트 보험회사 직원 엘리자베스 바살로씨는 "우리 동네에 있는지는 알았지만 와보기는 처음"이라면서 "놀랍다"고 말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달라는 레딩씨의 요청에 따라 방명록을 펼쳤더니 다녀간 사람들이 한 마디씩 적어놓은 평들이 다양했다.

"cool", "awesome", "sweet". "neat"와 같은 감탄사들이 줄을 이었다. 프레드 슐레이징거라는 사람은 "1955년에 와본 적이 있다"고 썼다. 일본 단체 관람객들도 흔적을 남겨놓았다. 6월 26일 도비 맥스웰은 "위대한 역사"라고 적었다. 25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케이 루스 프라이어는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19일 션과 빌리 오토씨 부부는 "우리 손자와 함께 역사를 나누고 싶었다"고 썼다.

맥도날드는 20세기 후반 역사의 흐름을 좌우한 세계화의 주역이었다. 그래서 세계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맥도널다이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표현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하지만 맥도날드는 어떤 세상으로 인류를 이끌고 가는가.

이미 오후 2시30분 넘었다. 박물관의 문을 닫을 때가 지났다. 관람객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끊이지도 않는다. 지금부터는 무보수 연장 근무시간이다. 레딩씨를 풀어줄 때가 됐다. 취재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철문을 열었다. 등뒤로 레딩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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