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7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11 09:30수정 2004.08.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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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좀 서운했다. 에리두만은 자신이 앞장서고 싶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궐내로 들어가 그들의 신전을 내리고 거기에 천신부터 모실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진정이 되면 곧장 바닷가로 나가 그곳의 바다 신마저 멀리로 쫒아버릴 작정이었다. 다시는 이상한 마법사가 얼쩡거리지 못하도록 그 바닷가에 참성단을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천신께 제배를 올리게 할 계획이었는데….

그러나 그는 곧 그 서운함을 해소해버렸다. 한 발 뒤에 선다고 해서 대사까지 치르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돌아보니 강 장수였다. 모든 참모들이 자기 침소로 돌아가지 못한 채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럽시다. 그대들도 이만 돌아가시오."

에인이 그들을 돌려보낸 뒤 자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잠자리까지 잘 펼쳐져 있었다. 그는 곧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전투전야의 흥분 때문이 아닌, 정신의 호수가 너무 맑고 투명해서 잠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어가는 데도 잠의 구름은 단 한점도 찾아들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내일 앞장을 서지 못한다는 것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 궁전을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양 기둥이 되어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그랬다. 자기 이름으로 접수될 성이라면 자신의 첫발이 그 성에 먼저 닿아야 한다. 그것이 주인 될 사람의 의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정을 훨씬 넘었다는 것, 그리하여 천체선인이 일러준 그 내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는 다시 신발을 조여 신고 밖으로 나갔다. 천막 밖에서 누워 있던 천둥이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녀석도 벌써 그의 외출의사를 알아챈 것이었다.

그는 천둥이와 함께 보초병을 피해 살금살금 진지 밖으로 빠져나왔다. 갈대 울타리가 저만치 뒤로 물러났을 때 그는 말등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에리두 성까지는 50여리 길이었다. 새벽 다섯 시면 군사들이 기상할 시각이니 그 전에 다녀와야 했다.


어느새 에리두에 도착했다. 사방이 조용했고 캄캄했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여 인가로 지나갔다. 집들도 사람들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벌써 저만치 성문 이 다가왔다. 전에 두두와 지나가본 적이 있어 천둥이도 기억하는지 그 어둠 속에서도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3백 보쯤 앞에서 횃불이 보였다. 성문이었다. 횃불은 양옆에 걸려 훤하게 밝은데 성문은 굳게 닫혀졌고 성문지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저 성문부터 접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으니 어렵지도 않고 어차피 혼자 온 것이니 자신의 손바닥을 찍는 것만으로도 이 성은 내 것이라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조용조용 다가갔다. 성문 앞에 닿자 천둥이가 몸을 돌려주었고 그는 손바닥을 펼쳐 성문에 갖다댔다. 단단한 나무 결이 느껴졌다. 종려나무인지 버드나무인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고 그는 그 위에 인장을 찍듯 손바닥을 꾹 눌렀다.

'됐다. 그만 돌아가자.'

성문에서 돌아나올 때 강 장수가 언급했던 해자가 보였다. 그것은 오른편과 왼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성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다리가 아닌 그냥 땅이었다. 그 길로 시장이나 항구, 어디든 곧장 갈 수가 있도록 뻗어 있었고 양옆으로 해자가 파여져 있었는데 에인은 문득 그 해자의 형태가 궁금해졌다. 그는 천둥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해자를 한번 따라가 보자꾸나."

천둥이가 성문 왼편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두워서 정확히는 가늠할 수 없으나 해자는 성벽을 따라 빙 둘러졌고 그 너비도 꽤 되어보였다. 강 장수가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백번 현명한 일이라 싶었다. 더욱이 성벽도 상당히 높았고 둘레도 한없이 길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해자가 굽어진 쪽으로 돌아나갔다. 거기서부터 성곽 뒤편이 되는 모양이었다. 별안간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뒤에 큰 호수가 있고 해자의 물은 그 호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안개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 어디쯤 수문이 있는지 물 흘러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급수로였다.

"천둥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에인이 천둥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개 때문에 성벽 전체를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그가 천둥이의 귀에서 막 고개를 들어올릴 때 화살 하나가 쉿 하고 날아와 바로 어깨 옆으로 스쳐갔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으나 눈먼 화살은 아닌 것 같았다.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안개 속에도 외방인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안개에 눈이 익숙한 성벽의 군사일 것이다.
그는 천둥이 등에 납작 웅크렸다. 천둥이가 급하게 등을 쳐올렸다. 어서 배로 가라는 신호였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고 그 틈에도 그는 천둥이의 배로 돌아누워 녀석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자 천둥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베히스툰에서 돌아갈 때처럼 녀석은 공중에서 바람타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에인의 귀에는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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