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20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16 10:41수정 2004.08.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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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은 이른 아침에 열렸다. 좀 일찍 도착해서 밖에서 기다리던 수레와 당나귀들이 차례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군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티그리스 강의 동쪽 저편에 있는 움마, 아라타, 니나 등에서는 그곳의 특산물이나 보석을, 성밖 촌장들은 그들 나름의 봉물을 싣고 오는 것이었다.


성문 양 옆에 서 있던 문지기들은 흐뭇한 눈으로 그 행렬들을 지켜보았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도 이 항구를 통해 무역을 하는 것임으로 이곳 군주와의 친선이 필요했고, 그래서 국제적 항구도시는 서로의 호혜로 이렇듯 번창하는 것이다.

해가 한 발쯤 떠올랐다. 봉물 행렬도 주춤해졌다. 이제부터는 초청받은 성밖주민들이 들어올 차례였다. 그들은 초청 받았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저마다 잘 차려 입고 한껏 멋을 부리며 그렇게 들어올 것이었다.

주민들 행렬도 뜸해질 때, 성 안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사열식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번에는 또 성 앞쪽에서 급한 말발굽소리가 질주해왔다. 군주의 생일이라고 외방에서 오는 친선 사열대인가?

성지기가 막 그런 생각을 할 때 말을 탄 세 사람이 성문을 향해 돌진해왔다. 맨 앞에 한 사람, 그 옆에 둘이 바짝 따라붙었고 스무 발짝 쯤 뒤에서는 수백의 말들이 태풍처럼 몰려왔다. 마치 서로 추적하듯이 달려와서는 눈 깜짝할 사이 모두 성안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그때 궁정 앞에서는 군주와 외방에서 온 내빈들이 모두 나와 사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사열식이어서 군악대들은 마음 놓고 북을 두드렸고 군주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넘쳐났다.

그럴 만도 했다. 선두에 선 검투사들, 그 뒤를 따르는 창기병들과 마차,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화살부대 등 그렇게 늠름할 수가 없었다. 내빈들 역시 그 웅장함에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군사력은 과시할수록 효과가 나는 법, 내년에는 더 많은 봉물이 들어올 것이었다.


한데 북소리가 너무 컸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적이 그 북소리를 업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수백의 기병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그들은 그 말발굽소리를 듣지 못했다. 별안간 북소리가 뚝 멈췄을 때 이미 적이 사열대 군사들을 짓밟기 시작했고 그 중 한 사람은 칼을 번쩍 쳐든 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단상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에인이었다. 그에게서 펄럭이는 것은 머리카락뿐 얼굴이나 몸체는 딱 굳어 있어서 마치 사람이 아닌, 상아로 빗어 만든 혼령 같아 보였다.

근위병들이 칼을 빼들고 에인 앞으로 뛰어들었다. 에인의 지휘 검이 휙, 하고 공중을 휘갈랐고, 그러자 근위병들의 목이 동시에 떨어져나갔다. 목이 세 개였다.
그 목들이 내빈들 발 앞에 떨어졌어도 단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을 하지 못했다.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라는 생각만 현기증으로 몰아쳐왔다.


단상 뒷자리에서 시중꾼 차림으로 에인을 기다리던 두두조차도 오금이 저렸다. 두두는 다급하게 에인의 눈을 찾았다. 어서 빨리 자기를 알아보라고, 자기는 두두라고, 간절하게 그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했으나 장군은 그를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이 유리알처럼 딱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장군은 두두 자기까지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때 에인이 칼이 번쩍, 하고 다시 휘날렸다.

'아아, 저 칼로 내 목까지….'

두두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천둥이의 소식을 듣고 자기는 말까지 보내주었는데, 그 말을 타고 와서도 장군은 눈이 멀어 두두를 베려는 것이다.

'그래, 벨 테면 베라, 대신 베고 나서도 내가 두두였다는 것만 깨달아라...'

그러나 그의 목에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두두는 다시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장군의 칼은 무고한 사람을 베지 않았다. 오직 두 사람, 군주와 군주 뒤에 서 있던 궁중 주술사였다. 주술사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으나 군주의 목은 반쯤만 베어져 그 주인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비로소 옆에 서 있던 내빈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두는 얼른 시종 복을 벗고 자기의 천리마를 불렀다. 장군을 태운 천리마는 자기 주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냥 스쳐갈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에인의 눈길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날 전투는 참혹한 피의 잔치였다. 기병들은 사열중인 군사들을 짓밟고 무기를 든 모든 군사들의 목을 찔렀다. 용맹을 자랑하던 검투사와 창기병들도 마치 진열된 인형들처럼, 자신들이 든 무기조차도 전시용이었다는 듯 단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갔다.

단 화살부대만이 맹공을 했고 그 덕에 수많은 말과 기병들이 다치긴 했으나 그것이 더욱더 기름에 불을 질러준 결과가 되었다.

복수의 화신이 된 기병들은 적들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창날로 짓이기는가 하면 멀리서 달려오는 적병들에게는 또 표창을 날려 낱낱이 도륙했고, 그리하여 궁전 앞 광장을 피의 강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 전투는 신들의 싸움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에인이 단상으로 뛰어올랐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누구인지, 어느 사람의 목을 베야 하는지도 가려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뛰어들었고, 칼을 쳐들었을 뿐인데 자신의 신검이 정확하게 군주의 목을 베었다. 또한 신검은 군주에 대한 예우로 그 몸을 쓰러뜨리지 않았고, 목도 반
만 떨어지게 한 채 그 어깨에 걸어두고 자신의 피로 온 몸을 적시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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