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27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27 09:51수정 2004.08.27 09:57
0
원고료로 응원
날이 저물어갔다. 부상자들과 할머니와, 닌, 두수는 마차에 실려 더 아래쪽, 안전지대로 옮겨갔다.

잔인하게도 다시 달이 떠올랐다. 그 달은 사방 곳곳을 되비추며 너희들 주둔지가 어떻게 짓밟혔는지 잘 보라고 시위를 하는 듯했다.


에인은 그 달이 보기 싫어 아까부터 머리를 싸쥐고 앉아 있었다.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다 보였다. 천막도 잃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병사들, 저만치 시신을 지키면서 울고 있는 보초병들의 눈물, 아직도 꺼지지 않은 기름 연기, 한사코 달을 향해 뻗어 오르려는 그 절망의 연기…. 그는 더욱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강 장수도 제후도 그저 망부석처럼 에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달빛 아래의 그 침묵은 모두들에게 고문과도 같았으나 그렇다고 입을 열어 아프다고 말하기엔 그 실의가 너무 컸다.

그런 숨 막히는 순간이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데 별안간 에인이 벌떡 일어났다.

"강 장수, 다시 적들이 오고 있오!"

내일 온다던 적이 지금 또? 강 장수는 소스라쳐 놀라 적이 오면 어디만치 오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당장 소리쳐 명령부터 내렸다.

"적들이다! 무장하라!"


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기병들은 칼과 창을 챙기고 말에 뛰어올랐고 보병들은 창을 잡고 가죽투구를 썼다. 강 장수는 재빨리 산병을 편성했다. 좌우 3조씩 6개 분대를 나누어 오백 보 이상 간격으로 앞쪽 양 옆을 매복하라고 일렀다.

"적이 나타나면 그 선봉들은 그냥 이쪽으로 통과시켜라. 선두에서 전투가 시작될 때 각 분대는 옆구리를 허물어라. 단 교전 시까지는 적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멀찍이 떨어져서 매복하라. 달밤이다. 이점 각별히 유의하라."


그렇게 모든 대비를 하고 기다리는데도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흘러갔다. 강 장수는 에인이 너무 상심한 나머지 헛것을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에인 역시도 지금 말을 타고 자기 앞에 있지 않은가.

잠시 후였다. 정말로 마차바퀴 굴러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장수가 서둘러 에인에게 말했다.

"장군님, 다시 저에게 지휘권을 주십시오. 설욕을 씻어야 합니다."

에인은 말없이 강 장수 뒤로 자리를 옮겨주었고 강 장수는 기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지 말라. 가능하면 유인작전을 이용하라."

가까이 다가오던 적들이 별안간 멈추어 섰다. 2백 보쯤 앞에서였다. 적들은 아군들이 전부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다. 보고대로라면 침략자들은 모두 지쳐 간신히 수습이나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뿌리까지 완전히 짓밟아버리려고 군주 자신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온 것인데 뜻밖에도 상대들은 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군주는 믿기지 않아 저 멀리까지 쏘아보았다. 높이 쳐든 보병들의 창들마저 살기를 띄고 까맣게 이어져 있었다.
침묵이 대치공간을 지배했다. 그러나 달빛이 더 이상 그 침묵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쪽 군사들이 창끝으로 땅을 치는 소리를 냈던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하라! 무슨 일로 남의 나라에서 진을 치고 있단 말이냐?"

강 장수가 제후에게 속삭였고 제후가 그 말을 통역해 큰소리로 외쳤다.

"너는 누구냐? 누군데 이 밤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나왔더란 말이냐?"
"내가 이 땅의 군주다."
"군주라면, 소위 사제였다는 그 자냐?"
"그렇다!"
"너희나라 사제는 지나가는 군사도 그렇게 치느냐?"
"너희들은 분명 우리를 치러왔다. 침략자를 두고 묵인하는 군주도 있다더냐?"
"그러면 지금은 왜 다시 나왔느냐?"
"너희들이 그 증거를 보이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도시를 치려고 나서고 있는데 어찌 아니 나올 수 있었단 말이냐?"
"이 밤에 우리가 너희들을 칠 것이라고 네 신이 일러주더냐?"

제후의 목소리는 훌륭했다. 강 장수의 말을 전할뿐인데도 자신이 마치 군주인 것처럼 위엄 있게 말했다.

"그렇다!"

군주는 맞받아 대답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분명 적들은 다리가 긴 말을 탄 기마병이라고 들었는데 자기들과 같은 셈어족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목소리도 중후해 저 아래쪽 어느 부유도시에서 북쪽으로 원정을 가는 군주인가 싶기도 했다. 그때 다시 제후의 모멸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사기꾼이다! 우리는 너희들의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재빨리 무장했을 뿐이다."

군주는 화가 치밀었다. 성급했거나 잘못 짚은 전쟁이라면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막 그런 생각을 하는 참에 적들이 자기 신을 모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지껄이는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 군주는 얼른 달을 쳐다보았다. 달무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마침 그 시간이었다. 군주가 빼락 소리를 질렀다.

"너 놈이 감히 나의 신을 모욕하느냐? 신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증거를 보여라!"
"저 강을 보아라! 그것이 증거다!"

모두 강을 보았다. 어느새 강에는 사람 키만큼 안개가 피어 있었다. 아군 군사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안개와 비바람을 일으킨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았다. 그때 천체선인이 재빨리 에인 옆으로 다가왔다.

"저 말 믿지 마십시오. 달무리는 어제부터 졌고 오늘 안개는 갑자기 날씨가 풀려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래요?"
"저자는 천체기후변화를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안개를 예상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왔지만 이 안개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강 장수가 재빨리 제후에게 '왜 비바람은 아니 부르느냐?' 말했고 제후는 그것을 받아 소리쳤다.

"그래, 비바람도 불러라!"
"우리의 비바람 신은 강하시다. 정말 그 신이 오신다면 너희들은 터럭도 남기지 않고 날려버릴 것이다!"
"그래, 어서 불러 실력을 보여라! 어디 우리 군사들을 날려보아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