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공원과 노래방, LDP의 추억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23)

등록 2004.08.27 16:09수정 2004.08.2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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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깜짝이야! 제발 그것 좀 안 끌래? 한밤중에 동네방네 시끄럽게 틀어놓으니 챙피하고 가슴 떨려서 어디 살겠냐?"


주무시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가 드디어 폭발하셨다. 한밤중에 DVD로 <매트릭스 레볼루션>(The Matrix Revolutions, 2003)을 본 게 문제였다.

영화 자체가 5.1 채널 돌비시스템으로, 영화 내내 싸우는 소리가 사방 스피커에서 쿵쿵거리니 영화 속에 빠진 나는 박진감 넘치는 소리의 세계에 감탄을 하며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별 관심 없는 노인 분에게는 극장 비슷하게 사방에서 들리는 음향이 잠이 확 달아나게 할 만큼 가슴 떨리게 하는 소음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저가형 홈시어터 시스템이라 출력이 낮은 게 이 정도인데 정말 나의 꿈인 고출력 기기를 설치했다간 우리 어머니 그 소리에 놀라 기절을 하실 거다. 그래도 때가 되면 별도의 아담한 AV룸을 설치하고 싶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얼른 영화 보기를 중단해버렸다.

디지털 시대의 총아인 DVD가 없었다면 예전 극장에서 자주 듣던 돌비서라운드 입체음향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집 안 거실까지 끌고 들어올 수 없었을 테니, 보급형 홈 시어터 시스템이 대중화된 현실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1993년 당시만 해도 새로운 시대의 총아라고 일컬어지던, 영화 <쥬라기공원>의 LD판을 우연히 보았을 때의 그 놀라웠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쥬라기 공원과 LDP (laser disk player) 시스템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지만 자칭 오디오 마니아란 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분은 2층에 방음 설치를 한 별도의 오디오 룸에 명품 오디오 기기들을 돈을 모아 하나씩 구입해 손수 설치해 놓고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를 방문한 손님들이라면 견학 필수코스일 정도로 주인의 자부심과 애정이 넘치는 오디오 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오디오 룸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오디오 룸을 구경시키는 주인이 손님 접대를 위해 빠지지 않았던 코스가 바로 <쥬라기공원> LD 시연이었다.

방의 조명이 꺼지고 서서히 스크린이 내려오면 일제 LDP가 작동되면서 공중에 설치된 또 다른 일제 프로젝터가 스크린을 향해 실감나는 화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스크린 속의 공룡들은 사방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가끔씩 구경자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면서 자신들의 발자국 소리며 콧김소리까지 생생하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극장처럼….

그 때의 그 문화적 충격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정말 이런 시스템이 많이 보급된다면 영화관이 망하겠구나…"라고나 할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LD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맨 처음 LDP가 새로운 영상산업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을 때만 해도 머지 않은 미래에 영화관이 망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복합 멀티플렉스로 체질을 개선해 나날이 발달하는 영화관과는 달리 당시 첨단 기기였던 LDP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손쉽고 빠르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계 자체가 워낙 고가여서 대중과 유리돼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생각보다 빨리 디지털이 대중화 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촌스러운 노래방 영상과 사라진 LDP

당시 디지털 반주기가 없었던 초기 노래방에서는 LDP를 주요 사용했다. LDP는 LP판 크기의 레이저디스크에 영상과 음악을 압축해, 바늘 대신 레이저로 움직였다. 당시 노래방 영상이라고 부르던 약간 촌스러운 영상의 화질과 음질은 뛰어났지만 단점 또한 만만치 않았다.

노래방을 경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노래가 바뀔 때마다 일일이 판을 바꿔줘야 하고, 신곡이 나올 때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LD를 구입해야 했으니 그 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신곡 미디 음원을 수시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고, '영상 따로 반주 따로'가 가능했던 디지털 노래반주기와는 경쟁 자체가 안될 수밖에.

결국 LDP시스템은 노래방에서 급속도로 밀려나게 됐다. 그러나 화질과 음향의 기억은 지금의 최신 디지털 노래반주기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뿐인가. 비록 노래방 반주기에는 밀렸지만 여전히 AV 마니아를 흥분시켰던 그 미려한 화면과 생동감 넘치는 음향의 주역이었던 귀하신 몸 LD는 그 후 소수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다가 자신의 크기의 반도 안 되는 DVD란 물건에 의해 쓸쓸히 역사 속으로 퇴장되는 신세가 돼버렸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부유한 소수의 마니아들만 향유하던 문화적 특권이 DVD가 보급되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보급형 홈 씨어터 시스템이 보급됨으로써 AV 마니아가 아닌 보다 많은 일반 대중들이 문화적인 혜택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구촌시대에 걸맞게 한국어,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까지 DVD 한 장에 각국의 다언어코드를 내장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가히 디지털 영상의 혁명 아닌가?

대중과 떨어진 신기술의 종말은?

역사 속에 쓸쓸히 사라져간 LDP를 보면서 결국 대중과 유리된 문화와 그를 담보로 하는 신기술의 생명력은 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DVD를 보면서도 10년 전 처음 LDP에서 목격했던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느꼈던 그때 그 생생한 화면과 공룡의 발자국 소리의 흥분과 강렬한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LDP시스템의 대중화가 더욱 아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세월이 또 흐르면 DVD 플레이어 시스템을 넘어서는 보다 진화된 시스템이 나오고 또 사라져갈 것이다. 그 선택의 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와 같은 일반 대중들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다 손쉽게 자신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최고 덕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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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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