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372

뭐야? 빌려줬다고? (10)

등록 2004.09.15 02:57수정 2004.09.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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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으으으으!"
"어머! 그러면 안 돼요. 자, 가만히 좀 있어 보세요. 여긴 너무 심하게…, 으음! 한두 군데가 아니군요."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던 이회옥을 보살피러 온 여인은 남궁혜라는 방명을 지닌 유심선자였다.


내원으로부터 죄수를 시료하라는 전갈이 왔었다. 하지만 모든 의원들이 급작스런 돌림병을 살피기 위해 출타 중이었기에 대신 온 것이다. 처음엔 흉악범인 줄 알고 잔뜩 긴장했지만 마치 넝마 쪼가리처럼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죄수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여 의복에 선혈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창약을 바르려다 흠칫하며 물러섰다.

"세상에…! 어떻게 이 정도가 되도록…? 너무해! 으음! 이렇게 놔두면 안 되는데. 안 되겠어. 침상이 있는 곳으로 옮겨야지."

죄수의 전신엔 수없이 많은 상처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선혈이 점점이 배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냥 땅바닥에 두면 십중팔구 화농(化膿)이 될 것이다.

한두 군데라면 어찌 해보겠으나 동시다발적으로 고름이 잡히면 치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칫 목숨을 잃게 되는 수도 있다.

그렇기에 보다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깨끗한 침상에 눕혀야 하는데 여인의 몸으로 육중한 사내를 들 수 없기에 도움을 청하려 밖으로 나간 것이다.


"어쩜 좋아. 죄수라도 아무것도 안 된다니…, 치잇!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어쩌지…?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유심선자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 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한 다발쯤 되는 붕대가 쥐어져있었다.


"으으으! 으으으으…!"
"어머! 정신이 드세요? 쯧쯧! 어쩌다 이 지경이 되도록…."

"으으으! 으으으으! 여, 여긴…?"
"여긴 규환동이라는 곳이에요."
"…!"

자신이 또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는 말에 맥이 탁 풀리는지 이회옥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맙소사…! 이건 정말 해도 너무했어.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이 되도록…, 쯧쯧쯧!"

이회옥을 살펴보던 남궁혜는 연신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상처였고, 모든 상처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혜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총동원하여 지혈을 하는 한편 향긋한 약향을 뿜어내는 금창약을 발랐다. 그리고는 준비해 온 붕대로 칭칭 감기 시작하였다.

대략 두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이회옥은 코와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곳에도 상처가 있기는 하였으나 숨은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휴우…! 이제 되었나?"

남궁혜가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낼 때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던 이회옥의 입이 열렸다.

"나, 낭자! 고맙소."
"어머! 아니에요. 고맙기는요. 그런데 상처가 너무 심해서 자칫 화농이 될 우려가 있어요. 그러니 가급적 움직이지 마세요. 일단 딱지가 앉아야 하니까요. 아셨지요?"

"고맙소. 그렇게 하겠소."
"소녀는 이만 나가봐야 해요. 갔다가 이따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쉬고 계세요. 아셨죠?"

"알겠소이다."
"그럼, 이만…".

남궁혜가 나간 뒤 이회옥은 잠시 꿈틀거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때문이었다. 지옥에서나 느껴질 법한 고통이었지만 더 이상 신음을 내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모친과 고모, 그리고 조연희에게 불상사가 생길까 걱정하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꼼짝도 않고 있느라 힘드셨지요?"
"으으! 으으으…!"
"어머! 이 열 좀 봐! 음! 이 상태로는 안 되겠어요."

늦은 저녁, 일과를 마치고 규환동을 다시 찾은 남궁혜는 연신 신음을 토하는 이회옥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찌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감았던 붕대가 흥건히 젖어 있었던 것이다.

하여 황급히 이마를 짚어본 그녀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규환동에서는 치료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되어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발걸음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중병에 걸린 죄수라도 시료를 위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회옥은 어떤 경우라도 뇌옥을 떠날 수 없는 일급 중죄인이므로 불가하다 하였기 때문이다.

"으음! 어쩌지…? 빨리 열을 내리게 해야 하는데…, 여기선 도저히 시료할 수 없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남궁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냥 두었다가는 송장 치우게 생겼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안 되겠어. 방주님께 보고해서라도 방법을 구해야지."

잠시 망설이던 남궁혜는 날랜 걸음으로 다시 나갔다. 소화타라면 이회옥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처럼 적극적인 것은 이회옥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아이를 낳아 기른 바 없지만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어미가 아픈 자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을 모성애(母性愛)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같은 시각, 이회옥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상처에서 느껴지는 아픔, 또한 과도한 실혈(失血)과 혹시라도 발설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마지막으로 국문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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