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라암~, 그 사라암, 결혼했어요"

사진결혼 파탄나면 남성은 재혼, 이주여성은 기댈 곳 없어

등록 2004.09.21 20:12수정 2004.09.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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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라암~, 그 사라암, 결혼했어요."


오랜만에 사무실에 들른 베트남인 깜지앙이 뜬금없이 누군가 결혼했다고 말하며 뭔가를 열심히 말하려고 하는 통에 주위가 잠시 어수선해졌다.

"친구가 결혼했어요?"
"아니요, 그 사라암, 그 사라암…."

대체 그 사람이 누굴까, 자꾸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로 봐선 내가 아는 사람인 듯싶은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통역을 부를 작정으로 전화를 들려고 하자, 깜지앙이 컴퓨터 앞에 앉더니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a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현수막 사진(외노협 이주노동자차별철폐자료집에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현수막 사진(외노협 이주노동자차별철폐자료집에서).

잠시 후, 깜지앙이 보여 준 것은 국제결혼 알선을 주로 하는 모 결혼정보회사 사이트였다. 시골길을 운전할 때, 도로변에 걸린 현수막에서 봤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깜지앙이 '그 사람'이라고 했던 사람은 자신의 전 남편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화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을 때 임의로 이혼 신고를 했던 그 사람이 베트남 처녀와 재혼을 한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깜지앙은 전 남편이 재혼하는 사진들을 이리 저리 들춰 보이며, 자신도 똑같이 이런 결혼을 했다고 우울하게 전했다.


깜지앙의 전 남편과는 전화 통화만 했지 사진으로나마 제대로 된 얼굴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순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깜지앙의 산재사고 후, 결혼정보회사는 나에게 깜지앙이 다른 베트남인들을 만나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과 깜지앙을 베트남으로 돌려 보내는 것을 도와 달라는 연락을 해 왔다. 결혼정보회사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무시하고 한참 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퇴원 후 산재처리를 하면서 결혼정보회사의 꿍꿍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산재처리를 위해 화재로 소실된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깜지앙이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만에 이혼 수속이 진행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이 파탄에 이를 경우 재혼도 시켜 준다는 자신들의 '보증'을 이행하기 위해 발빠르게 진행시킨 듯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이혼이 남편 측의 임의 의사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혼 무효 소송을 할 수 있고, 그것을 변호사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만 깜지앙은 괜찮다고 했다. 깜지앙 본인 역시 전 남편과 다시 살 뜻이 없기 때문에 절차상의 문제는 시비 걸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잊고 있었던 전 남편이 재혼했다는 사실 앞에서 깜지앙이 화가 나 있는 것을 보며,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녀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깜지앙은 종종 결혼정보회사 사이트에서 남편과 결혼할 때의 사진을 보았던 것이다.

최근 10여년간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은 10만2천명에 이른다. 현재 국제 결혼은 주로 결혼정보회사나 통일교, 개인 브로커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사진 한번 보고 결혼하는 '사진 결혼'도 많은데 그러한 결혼이 파탄 날 경우 깜지앙처럼 남성은 재혼, 여성은 의지할 구석이 없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사진만 보고 결혼정보회사의 말만 믿은 채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나이 많은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피해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성부는 아직까지 이들 이주여성을 위한 정책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주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첩첩이 쌓인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살고 있다. '베트남(월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이 우리 주위에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이주 여성에 대한 겹겹의 차별은 걷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겹겹의 차별을 단호하게 걷어내는 일들이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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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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