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 호랑이 이야기 79

조왕신의 불기둥 3

등록 2004.09.30 20:50수정 2004.09.3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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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왕신님은 부엌일을 맡아보고 계세요. 집안을 돌보는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많은 일
을 하시죠, 저 불꾼들은 다 부엌에 살고 있습니다. 집안의 불씨가 되어서 부엌을 돌보
고 있는데, 부엌에 있으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들을 모아서 조왕신께 보고해 드리기
도하고, 또 다른 곳의 불씨가 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바리는 그 많은 불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기둥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습니
다. 기둥 안을 바쁘게 다니는 가운데에서도 바리와 백호를 쳐다보면서 인사를 하는 불
꾼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와 함께 있던 불꾼은 불기둥 하나에 다가가서는 거기에 적힌 글자를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바리가 물었습니다.

“그 글자들은 다 뭔가요?”

불꾼이 대답했습니다.

“이 불기둥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부엌으로 다 연결되어있죠. 집이 작건 크건, 부자
이건 가난하건 한 집에 이렇게 한 개씩 불기둥이 있는 셈이랍니다, 저 파란 기둥을 통
해서 불꾼들이 부엌에 다닙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리고 살림살이를 보면서 그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기에 다들 기록하고 있
는 거죠. 저길 한번 보세요.”

가운데 서있는 기둥에서 불꾼 하나가 푸른 꼬리를 끌며 나왔습니다. 역시 가슴에는 무
언가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바리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불기둥에
다가서서는 가슴을 활짝 열었습니다.


무언가 푸르스름한 연기 같은 것이 나오더니 끝이 날카로운 연필처럼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돌에 조각을 하는 것처럼 불꽃을 튀기면서 그 불기둥 위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글씨가 한자 한자 새겨지면서 푸르스름한 연필은 점점 작아지더니 글씨 쓰기를 마쳤는지 금세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꾼이 말했습니다.

“이제 조왕신님은 곧 저 많은 소식들을 다 안고 상제님께 올라갑니다. 원래 같으면
이곳에 불기둥마다 글씨를 쓰는 불꾼들로 아주 바쁘겠지만, 지금은 다들 조왕신님께
가야해요. 이제 시간이 되거든요”

백호가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 겨우 글씨를 새긴 저 불꾼은 무엇인가요?”

불꾼이 바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바리 아가씨 집입니다.”

바리가 대답했습니다.

“네, 뭐라구요? 저희 집이라구요?”

불꾼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대답했습니다.

“네, 바리 아가씨 댁이에요.”

“저기에, 저기에 뭐라고 적혀있는데요? 우리 집은 지금 아빠도 엄마도 아무도 없어서 부엌은커녕 집에도 아무도 없을 텐데…. 혹시 벌써 엄마 아빠가 돌아와 계신가요? 그
래서 벌써 부엌에 불을 피운 거예요?”

바리가 침도 삼키지 않고 말하자 옆에서 백호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바리야…, 저기 적힌 것들은 오직 조왕신님과 상제님만이 알 수 있어. 우린 무슨 내
용이 적혀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단다.”

바리가 말했습니다.

“혹시 그 나쁜 호랑이들이 전부 항복을 한 거 아녜요? 그동안 우리가 호종단도 만나고
버드나무 가지도 가지고 오면서 호랑이들이 가는 길을 전부 막아놓았잖아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온 것이 분명해요. 그래서 지금 날 기다리고 있는 거
야. 얼른 집에 갈래요.”

그리고나서 바리는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리의 등 뒤 바닥에서 불꽃 하나가 길게 올라왔습니다. 그러더니 사람의 모습이 되어 바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바리는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붉은 옷을 입을 아주머니였습니다. 아니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이글거리는 불빛이 그 아주머니의 몸을 타고 올라와 긴 옷을 만들어준 것 같았습니다.

땅에 끌린 듯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옷은 치마도 만들어주었고 더 올라가서는 예쁜 옷고름이 달린 저고리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붉게 빛나는 비녀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백호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며 절을 올렸습니다. 바리는 그냥 그 아주머니 얼굴
을 보면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습니다. 조왕신이 틀림없었습니다.

조왕신은 바리를 가만히 돌려세웠습니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서 품에 안아주면서 말했
습니다.

“어서 오거라, 우리 아기, 어서 와.”

불덩이로 만든 것 같은 옷이었지만, 바리는 전혀 뜨겁지 않았습니다. 바리가 울면서
흘리는 눈물은 그 옷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습니다. 조왕신은 바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울지 말거라, 울지 마, 그래, 집에 가면 엄마 아빠가 널 기다리고 계시단다. 얼른
가고 싶지?”

바리는 울기를 멈추고 조왕신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주 인자하게 생긴
아주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꽃색깔 때문인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아
름답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바리가 어렸을 적 동네에 살던 아주머니 같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그냥 시장에서 일하시는 고운 아주머니 같기도 했습니다. 아주 평범한, 그러나 정말 곱디고운 얼굴이었습니다.

바리가 말했습니다.

“저 그냥 집에 가면 안돼요? 엄마 아빠가 절 많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래, 가고 싶니?”

조왕신이 되묻자 바리가 백호를 보고 말했습니다.

“백호가 저보다 더 용감하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전 그냥 백호가 시키는 대로
천주떡 먹고 백호가 하는 대로 은행나무 문을 열고 들어왔고, 다른 분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했을 뿐이에요,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전 그냥 어린 계집애일 뿐이라구요.”

백호가 다가와서는 바리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습니다. 바리는 백호의 목을 가만히 감
싸안았습니다.

조왕신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자 조금 전에 한 불꾼이 기록한 바리네 집 불기둥에 쓰인 검은 글자가 조금씩
지워져 갔습니다. 바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래요? 우리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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