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상품"

[정치 톺아보기 72] 기업예찬 여념 없었던 노 대통령의 인도여정

등록 2004.10.06 01:42수정 2004.10.0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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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인도를 공식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4일 오후 LG전자 인도법인 공장을 방문해 김광로 부사장의 안내로 공장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인도를 공식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4일 오후 LG전자 인도법인 공장을 방문해 김광로 부사장의 안내로 공장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김동진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얘기가 있다. 외국에 나가본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경험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20세기에는 주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내세운 스포츠가 그런 국가 혹은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케 해주는 매개체였다. 적어도 밖에서 본 대한민국은 88 서울올림픽을 통해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데 이어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렇다면 세계화와 개방으로 요약되는 21세기에는 무엇이 스포츠를 대신하는 '대한민국 대표선수'로서 그런 매개체 역할을 할까. 노무현 대통령이 인도에서 확인한 '정답'은 삼성 휴대폰과 LG 냉장고, 그리고 현대 자동차이다.

대한민국은 몰라도 삼성 휴대폰과 LG 냉장고, 그리고 현대 자동차는 안다?

a 노무현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환영하는 한국기업의 광고판.

노무현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환영하는 한국기업의 광고판. ⓒ 오마이뉴스 김당

노 대통령의 인도·베트남 국빈방문 및 ASEM 회의에 앞서 노 대통령의 외교통상 분야 가정교사인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이 "이번 순방의 전략적 목표를 '개방형 통상국가'로서의 국가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확고히 재천명하겠다"고 밝혔을 때만 해도 사실 그 의미에 대해 '긴가 민가'했다. 노 대통령이 그 의미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인도 방문에서 그 의미의 메시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우선 노 대통령은 2박3일의 인도 국빈방문 일정을 LG전자 인도법인 노이다 공장 시찰로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4일 오후 2시10분(현지시각)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해 숙소에 들러 여장을 푼 뒤 곧 바로 뉴델리에서 남동쪽으로 50km 가랑 떨어진 곳에 위치한 LG전자 인도 현지법인(LGEIL)을 찾았다.


노 대통령은 그 50km 거리 가운데 뉴델리 외곽에서 공장으로 이어지는 25km 구간에 걸쳐 고속도로 양편의 전신주에 걸린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을 환영하는 배너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은 물론 동행한 기업인들, 그리고 기자단에게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인도는 그 면적이 남한의 33배에 이르고 인구가 10억5천만 명이나 되는 '대국'이다. 아직 가난하지만, 인도인들에게는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로서 인류 3대 문명의 하나를 일구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인도는 컴퓨터 시대의 도래를 가져온 숫자 0을 처음 발견하고 목화로 의복을 만들고 닭을 처음 사육한 나라다.


내세와 윤회를 믿는 힌두교의 관습 탓도 크지만, 그래서 이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이곳의 자존심 강한 언론은 어지간한 나라의 국가원수의 인도 방문쯤이야 '일단 기사'로 처리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한 국민으로 가득한 이 나라는 외국의 어지간한 규모의 경제원조에 대해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정도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대통령인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우리 상품인 것 같다"

a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 현대 건축물인 바하이 명상원의 인도인들.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 현대 건축물인 바하이 명상원의 인도인들. ⓒ 오마이뉴스 김당

사실 한국과 인도는 지난해로 수교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양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고 그런 나라'의 하나였다. 어쩌면 자존심 강한 인도에게는 한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한국은 인도를 '방치'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 The Times of India> 같은 인도의 유력지가 노 대통령의 인도 방문에 비교적 넉넉한 지면을 할애한 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만든 것은 대한민국 외교가 아니라 삼성 휴대폰과 LG 냉장고, 그리고 현대 자동차였다.

노 대통령은 4일 저녁 뉴델리 임페리얼 호텔에서 열린 우리 경제인과의 만찬에서 그 속내를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방문 때도 그랬지만 인도에 와서 제일 반가운 것은 솔직히 '대통령 환영합니다'라고 써놓은 것이고, 그 밑에 있는 우리 기업의 이름과 로고가 더 반가웠다. 그리고 길가에 붙어있는 기업 홍보판을 보면서 가슴에 찡하게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엄청 출세한 느낌이다."

이어서 노 대통령은 경제단체장들과 구본무 LG 회장 등 동행한 기업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서도 그랬지만 해외에서 (기업인들을) 만나면 각별한 느낌을 갖는다. 제가 '국가대표'라고 해서 4강 순방 마무리로 러시아를 가고, 브릭스(BRICs) 경제외교 중요성을 감안해 인도에 왔다. 와서 보니까 '국가대표'가 저인 줄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우리 상품인 것 같다."

a 인도의 유력지 <The Times of India>에 실린 노 대통령 회견기사.

인도의 유력지 에 실린 노 대통령 회견기사.

노 대통령은 또 "인도의 경우 러시아만큼 많은 소득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으나 여러분들이 벌여놓은 일은 상상을 뛰어넘었다"면서 "정부는 머릿속에 기업들을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기업 예찬'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저녁에 가진 인도 교민 초청 동포간담회에서도 "나는 우리 기업들이 정말 참 자랑스럽다"고 다시 한번 기업 예찬론을 펼쳤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외국에서 돈만 벌어가는 기업에 대한 예찬이 아니었다.

"우리가 80년대 시민사회 운동하고 정치하면서 외국기업이 장사만 하고 이익만 가져가는 것 아닌가 해서 노조도 별나게 날뛰고 그러지 않았느냐. 우리 기업보다 외국인 기업의 노동자들의 분규가 많고 심리상태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 보면서 그런 것을 훌륭하게 극복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윈윈'(win-win)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런 기업이 LG뿐이겠느냐."

실제로 그렇다. LG전자와 삼성전자의 TV, 에어컨,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인도에서 시장 점유율(36∼68%) 1위다. 국립 네루대 박사과정에 있는 한국 유학생 류주열씨에 따르면, 인도의 대학 졸업생들에게 삼성전자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다. 현대자동차가 현지 생산한 산트로, 액센트, 소나타 등 3개 차종은 모두 경·소·중형차 부문의 베스트셀러다.

주 인도 한국대사관에서 지난 2002년 12월에 인도 여론조사기관인 ORG-MARG에 의뢰해 실시한 우리나라의 국가이미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과반수 이상이 한국을 경제선진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런 인식의 매개체는 물론 우리 상품이었다.

또 같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도인의 대부분은 인도에 투자진출한 우리 기업의 활동을 높게 평가(85%)했으며, 업체별로는 LG(30%)·대우(21%)·현대(20%)·삼성(17%) 순이었다. 그리고 인도인들이 한국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우수품질(62%)이 가격 저렴(18%)보다 훨씬 더 컸다.

자존심 센 인도 언론의 반응과 한국기업의 활약상

a 노 대통령과 인도의 싱 총리가 5일(현지시각) 인도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인도의 싱 총리가 5일(현지시각) 인도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자존심 센 인도 언론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는 정치 뉴스에 강한 매체로 알려진 < The Hindu>지는 지난 1월 28일자에서 한국기업의 활약상을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기업은 인도시장 점유뿐 아니라 인도인들의 마음까지 점유한 듯 보인다. 인도시장 내의 구형상품 처리 마케팅을 펼쳤던 일본기업들과는 달리 한국기업들은 신기술의 신상품을 내놓았고, 현지사정에 알맞은 디자인과 가격 제공은 인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충분했다."

노 대통령은 5일 만모한 싱 총리와의 한·인도 정상회담에서도 LG전자 인도 공장에 들렀던 소감을 다시 한번 피력했다.

"한국기업과 국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러시아 모라토리움 때나 중국 사스 사태 때 한국기업은 철수하지 않았다. 한국기업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특별히 강해진다. 그리고 또한 인연을 오래 유지하고 의리를 매우 중시한다."

그러자 싱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화답했다.

"한국과의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 한국은 한 세대만의 급속성장을 하면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발전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국기업은 장기적 관계를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 각하의 이번 국빈방문은 양국 협력을 발전시키는 데 뚜렷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 직후 가진 한-인도 경제인 초청 오찬에서도 LG전자 인도 공장에 들렀던 소감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피력했다. 이 자리에는 인도 언론 취재진 20∼30명을 포함해 300명의 경제인들이 참석했다.

LG에서 시작해 LG로 끝난 노 대통령의 정신적 인도 여정

a 노무현 대통령이 5일 오후(한국시간) 뉴델리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인도 경제단체 초청 오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5일 오후(한국시간) 뉴델리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인도 경제단체 초청 오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광환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대국' 인도의 총리로부터 칭찬을 받은 탓일까. 노 대통령은 최근 카자흐스탄, 러시아, 인도로 이어진 잇따른 해외순방에서는 처음으로 사전 배포된 연설문대로 읽지 않고 완전히 '즉석 연설'을 했다.

"어제 LG 인도공장을 들렀다. 갈 때 한국 LG로고가 길가에 계속 붙어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LG가 한국기업이라고 생각했다. 가서 현장을 보고 설명을 듣고 제 머리는 혼란이었다. LG 인도공장은 한국기업인가 인도기업인가 한참 생각했다. 그래서 방명록에 '여러분이 손잡고 이룩한 이 업적이 오래오래 인도의 자랑스런 역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미 LG 인도공장은 한국기업일 뿐 아니라 인도기업이다'고 생각해 그렇게 썼다."

노 대통령의 레토릭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정신적 인도 여정은 LG에서 시작해 LG로 끝난 셈이다.

인도 최고의 명문대학인 국립 네루대의 G.K 차다 총장은 < The Times of India>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인도의 유력지인 < The Hindustan Times>(10월 5일)에 기고한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은 인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미 고도로 세계화된 한국에 비해 인도는 갈 길이 멀다"면서 한국을 벤치마킹할 것을 주문했다. 미국의 연례 대학 평가에서 늘 세계 20위권 안에 드는 명문대이자, 인도의 좌파 지식인들의 '소굴'인 국립 네루대의 총장이 한국 예찬론을 펼친 것이다.

인도 여정에서 개방형 경제 마인드와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해진 노무현 대통령은 6일 한국과 구원(舊怨)이 있는 베트남으로 향한다. 과거에는 눈길도 안주던 인도 정부가 'Look East' 외교정책으로 한국과 눈을 맞추려고 애쓰듯이, 베트남 또한 이미 한국은 물론 미제(美帝)에 대해서도 '과거는 덮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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