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후유증 이주노동자와의 만남

전쟁의 상처도 서러운데, 체류 자격 있음에도 강제 추방 위기에 놓여

등록 2004.10.08 10:48수정 2004.10.0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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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로이 흥 부부와 최사범

로이 흥 부부와 최사범 ⓒ 고기복

퇴근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베트남인 부부와 베트남어 통역을 담당하는 최 사범이 초코파이 한 상자와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다. 최사범은 베트남 국가대표 태권도 사범으로 칠년 이상 지도했던 경험이 있어서 베트남인들이 친형처럼 따르는 사람이다.


지난 4일 아침 최 사범이 탄원서를 써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며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 기자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함석 공장에 로이(Roi, 32)라는 사람이 있는데, 로이의 부인이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붙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본 결과, 로이의 부인인 흥(Huong, 32)은 합법적인 체류자격(단순노동비자, E-9)을 갖고 있었지만, 근무처 이탈이라는 이유로 출입국 직원들에게 체포된 후 강제출국을 당할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근무처 이탈이라는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님이 너무 쉽게 밝혀졌다. 흥이 근무하던 회사에 전화를 해 본 결과, 지난 9월 12일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해 눈 부위에 나타난 피부병인 모낭성 종양 형태의 혹(여드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위해 회사 측에서 휴가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추석 연휴가 끝나고도 흥이 업무에 복귀하지 않자, 회사 측에서 수소문을 한 끝에, 흥이 출입국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근무지 이탈 부분에 대해 회사 측이 수술 후 요양을 위해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하도록 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출입국 직원에게 전달했는데도 흥을 풀어지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문제가 됐던 부분은 고엽제로 인한 피부병에 대해 일반적인 베트남인들이 그렇듯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흥이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남편 로이가 근무하는 공장에 잠시 와 있다가 추석 연휴 전인 9월 21일 남편의 일을 도와주는 와중에 수원지방 출입국 직원들에게 근무지 이탈로 체포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흥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갖고 있는 외국인으로, 회사 측의 휴가 허락이 있었다는 점에서 강제 추방이라는 조치는 합당하지 않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리고 평소 흥이 종종 놀러 갔다는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에도 연락하여 탄원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했다.

기자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켜 본 까닭은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진 자에 대한 출입국직원들의 일방적인 태도도 문제였지만, 베트남전의 큰 상처인 고엽제 피해자인 흥에게 베트남전의 한 당사자였던 대한민국은 좀 더 아량을 갖고 대해 주는 것이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도 마땅하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탄원서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토록 완강하게 강제출국 의사를 밝히던 출입국에서 흥을 풀어주기로 결정하자, 흥이 일하던 회사 대표가 창원에서 올라와 보증 서명을 하고 6일 오전에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흥은 창원에 내려가기 전에 감사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달리 한 것 없이 고작 탄원서 한 장 써 주었을 뿐인데 넘치는 인사 치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나본 로이와 흥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흥은 고엽제 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정도로 겉으로 봐선 얼굴이 깨끗해 보였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피부병이 있다 길래 얼굴에 큰 흔적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하자, 흥은 기자의 손가락을 잡아끌며 양 눈썹 끝에서부터 이마까지 훑게 했다.

뼈처럼 단단한 모낭성 종양을 손가락 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처럼 수술을 통해 다 제거한 줄 알았지만, 제거해도 또 생기고 또 생겨서 일반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한 종양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고 한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흥이 미소 지으며 말을 마쳤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심각하게 고통 받고 있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억울한 강제 출국을 면한 것만으로도 기뻐서 그런지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고엽제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덧, 흥의 부모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흥의 부모는 하노이 남부 출신으로 두 분 다 영관급 장교로 전역하셨다고 했다.

부모가 군인이었다는 말에, 그렇다면 그분들이 베트콩이었냐는 질문에 그저 웃기만 한다. 나도 웃고 최 사범도 웃었다. 아마 그런 류의 어색한 질문은 한국에 살면서 여러번 받아 보았을 성 싶었다.

전쟁의 상처도 서러운데,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갖고도 열흘 넘게 부당한 취급을 당했던 흥은 그저 웃기만 한다.

어찌됐든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여인을 눈앞에 두고 ‘베트남 노동자 문툰’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베트남 노동자 문툰

군포역 앞 시장 골목
좌판이건 천막이건 함부로 들썩들썩 흔들며 까불어대던
바람도
팔뚝으로 머리로 징긍장글 날아와 붙던 빗방울도
공동화장실이 있는 이층 순댓집 계단부터는
감감히 아래로 주저앉는다.

-중략-

한국말도 제법 하는 베트남 청년으로,
나이 서른셋에 이름은 문툰이라.

얼마나 됐어?
칠년이요.

그럼 아파트 한 채 살 돈 벌었겠네.
그 정도는 돼요.

그럼, 고향으로 가야지. 식구들도 보고 싶을 것 아녀.

안 가요.

왜 안가?

반말하지 마세요, 헤헤헤. 돈 더 벌어야 되요.

그래? 그럼 이젠 좀 돌아가 주세요, 우린 노임이 십년 째 제 자리야,
우리가 죽겄다, 됐나요?
나는 이십년 일했어도 집 한 채 없어, 됐습니까?

아니요, 퇴직금, 월급 많이 먹혔어요. 나쁜 사람들, 헤헤, 하면서
왼손가락을 세 개 쫙 펴드는데,
엄지가 없다.

할 말이 없어, 우리는 입을 꿍 닫고 무르춤하고 있었는데,
강이 마침내 한마디 한다.

베트남전쟁 때도 그렇고 지금도 우리가 죄를 많이 짓고 있다.
화해의 술잔, 어때?

좋아요, 한국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참 좋아요.
사장들, 나빠요.

그렇게 우린 술잔을 높이 쳐들고
장엄하게 건배를 했는데,

그때 나는
요따위 작은 술잔으로 베트남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갚아질까 생각했던가,
우리끼린 이렇게 다 같이 잘 살고 평화롭고 싶은데
권력만은 날카롭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채로
절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했던가.

-중략-

나는 그때 인생이 검불 같다, 그렇게 생각했던가.
판초우의 위에 번득이는 칼날을 봤던가,
다리가 잘린 이라크 아이를 봤던가, / 조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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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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