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만난 한 젊은 구두 수선공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0) 그에게 구두를 닦은 사연

등록 2004.10.09 16:29수정 2004.10.1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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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밑창이 벌어지다


작가회의에서 메일로, 문자메시지로 토요일 모임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텃밭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는 농작물도 있어서 가느냐 마느냐 며칠을 고심하던 차 아내도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다고 하여 짐꾼 노릇 겸, 서울 나들이를 했다. 서울 가고 오는 시간은 불과 6시간 정도지만 한 번 다녀오면 생활이 리듬이 끊어져 버린다.

도를 닦는 사람들이 출가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그렇다고 내가 도를 닦는 대단한 일도 하지 않지만 들락날락 나들이를 하다보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작가회의 모임에 몇 차례 빠져서 미안키도 하고 갑자기 아이들도 보고 싶었다.

며칠 전에 딸아이 생일이었는데 깜빡 잊고 지내다가 그날 오후에야 알고서 온라인으로 생일 축하금을 몇 푼 보냈지만 어쩐지 아비로서 할 노릇을 못한 것 같던 차 이번 서울나들이 나흘 중 하루 저녁은 네 식구가 밥이라도 한 끼 사서 먹기로 했다.

도착 다음 날인 금요일(7일), 세 건의 약속을 만든 후 집을 나섰다. 신발을 신고 구두에 솔질을 하다가 보니까 신발 밑창이 떨어져 있었다. 손으로 거기를 벌리자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린 양 밑창과 구두 코 부분이 짝 벌어졌다.

신발장을 뒤져 다른 신발이라도 있는가 살폈으나 신발만은 일찌감치 모두 안흥에 옮겼나 보다. 다른 한 쪽도 밑창을 살피니 마찬가지로 떨어져 있었다. 헤어보니 한 4년 신은 듯했다. 이 참에 새로 한 켤레 사 신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채 마무리 구두 솔질을 하는데 거기 외는 아직 말짱했다. 그래서 오랜 단골인 적선동 버스정류장 옆 수선가게에 들러 잠깐 고쳐 신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을 나섰다.


버스가 효자동에 이르자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부중앙청사 부근에 무슨 시위가 있는 모양이었다. 미적미적하던 차가 적선동에 이르자 여느 때보다 20여분은 더 늦었다.

그래도 신발이 불안하여 구두 수선소를 찾았더니 단골 주인이 점심 식사 중인지 자리를 비웠다. 나도 점심 약속을 한지라 이따가 다른 가게에서 고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거기 경복궁 역에서 강남 방향 지하철을 탔다.


광화문 거리의 구두 수선공

후배요 전 동료 교사와 점심을 나누고, 곧장 선배요 전 동료 교사를 만나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다음 약속은 저녁 가족모임이다. 아들이 직장에서 늦게 끝나기에 저녁 7시 30분에 광화문에 있는 한 양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여 남았다. 교보문고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가 조금 일찍 약속 장소로 천천히 가는데 거리에는 벌써 해거름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광화문 전 교총 건물 옆 광명약국 앞 구두 수선가게(112호)가 열려 있었고 수선공이 구두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그제야 내 구두가 생각나서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손짓했다. 그는 언어장애인이었다. 그는 구두도 닦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나는 밑창만 붙여 달라고 손짓으로 답했다. 그는 알았다고 고개로 답했다.

나는 그의 구두 수선 가게로 들어가 신발을 그에게 벗어주고 곧 수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는 닦던 구두를 내려두고 내 구두를 든 후 밑창 벌어진 양면을 페이퍼로 손질하고는 칫솔에 본드를 적셔서 두 짝 모두 아래 위 부분에 정성껏 바른 후 가게 바깥에 세워두고는 다시 조금 전 닦던 구두를 무릎에 올려놓고 광을 내었다.

나는 그의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두 닦는 솜씨를 즐겼다. 그는 구두에다 먼저 구두약을 듬뿍 묻힌 솔로 온통 닦은 후 다음에는 라이터용 기름을 천에 촉촉이 적신 후에 구두 표면을 손이 보이지 않도록 빠르게 문질렀다. 그러자 금세 빤짝빤짝 윤이 났다. 좀더 낡은 구두는 다시 부탄가스 불에다가 훈제하듯 불을 쬔 후 문지르자 낡은 구두도 빤짝빤짝 윤이 났다.

나는 빨리 구두 가게를 벗어나고자 그에게 내 구두를 빨리 고쳐 달라고 손짓했더니 그는 벌컥 화를 내었다. 그의 손짓과 입 모양을 미루어 짐작에 '아직 당신 구두에 바른 본드가 굳지 않았다. 이 일은 내가 전문가이니 나에게 맡기고 좀더 느긋하게 기다려라'는 말 같았다. 그러면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사죄하면서 잘 몰라서 그랬다고 본드가 다 굳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두 켤레 구두를 다 닦아서 손님에게 주고 돈을 받고는(한 켤레에 2000원씩) 그제야 내 구두를 집어들더니 신 모양의 쇠붙이에 넣은 후 밑바닥을 망치로 여러 번 두드린 후 다시 손으로 누르면서 몇 번이나 접착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그 광경을 쭉 지켜보면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 친구가 시간을 끄는 걸 봐서 꽤 여러 푼을 요구할지 모르겠다고, 미리 값을 흥정치 않은 게 약간 후회됐다. 그러면서 2, 3천원은 줄 각오를 했다.

마침내 그가 구두 두 짝을 내 발 앞에 놓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석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한 장만 집더니 다시 동전통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찾아서 나에게 거스름돈으로 주었다.

나는 그에게 수선료가 500원이냐고 하자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구두 한 켤레 닦는 이상으로 수고했는데 500원만 받다니…. 요즘 500원이 돈인가? 얼마 전에는 가방 끈 떨어진 것을 깁고는 5000원이나 주지 않았던가. 나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한사코 돌려줬다.

시계를 보자 아직 20여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구두를 닦아달라면서 2000원을 더 주자 그는 1000원만 더 받겠다고 했다. 나는 계산은 계산이라고 했더니 그는 그제야 2000원을 받고는 다시 500원 동전을 줘서 받아 넣었다.

사실 나는 구두 닦는 값이 얼마인지도 모를 만큼, 내 구두는 직접 닦아 신었다. 언젠가 '링컨의 전기'를 읽었는데, 링컨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당신 구두는 자기가 닦아 신었다는 대목을 보고는 그때부터 내 구두는 스스로 해결했다.

지금은 군대 내무생활이 많이 개선되었을 테지만, 내가 군대 생활하던 1960년만 해도 전방 소대장은 엄청 대접을 받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도 따끈한 세숫물에 칫솔에는 치약이 묻힌 채 물 컵 위에 놓여 있었다. 소대장들은 전령들의 철모 위에 군화를 올려놓으면 손이 보이지 않게 빛이 뻔쩍 나도록 닦아주었다.

내 밑에 여러 전령이 거쳐갔지만 그 짓만은 시키지 않았다. 가능한 내가 닦겠지만 전령이 꼭 닦아주겠다면 신발을 벗어놓을 때만 닦아두라고 했다.

제대 후 곧장 교직에 몸담고는 내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은 구두약과 솔, 장갑, 헝겊을 넣어두고 수시로 닦아 신었다. 동료 선생님들이 가끔 이용키도 했다. 그 버릇은 지금도 계속돼 내 집 신발장에는 구두 닦는 도구가 항상 갖춰져 있다.

1960, 70년대에는 서울 장안에 구두닦이 소년들이 엄청 많았다. "신발 닦~ 으세요"하는 그들의 음성이 여태 내 귀에 쟁쟁하다. 명동 전 국립극장 앞 길가에는 수십 명이 의자를 늘어놓고 손님을 맞았다.

서울역에서는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사람들이 구두 한 번 닦고 흠뻑 바가지를 쓰고, "서울 가면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구두닦이도 횡포도 심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밥벌이 수단이 신문팔이와 구두닦이였다. 그렇다고 신문팔이나 구두닦이도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없었다. 자릿세나 권리금을 줘야 번화가에서 영업할 수 있었다.

그가 내 구두를 닦는 동안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기면서 오랜 옛 친구 구두닦이 왕눈이도 잠시 떠올려보았다. 찐빵을 한꺼번에 열 개 이상 먹었던, 무섭지만 인정이 많았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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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잎처럼 지고 싶어라

내 인생에 기쁜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참 오랜만에 광이 뻔쩍 나는 신발을 신고 기분 좋게 약속장소로 가다가 다시 그의 가게로 가서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그는 메모지에 '김수철(35)'이라고 적어 주었다.

약속 장소로 가자 그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제야 예약을 하는데 아가씨가 내 이름이 멋있다고 예명이냐고 물었다. 본명이라고 하면서 이름만 멋있느냐고 하자 사람도 멋있다고 깔깔 웃으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곧 남은 식구들이 다 왔다. 네 식구가 아주 즐겁게 저녁을 먹었다. 내가 오늘 구두를 닦았다고 했더니 딸과 아들이 웬 영문이냐고 물었다. 조금 전 일을 다 들려줬더니 그 장애인 구두 수선공이 '방망이를 깎는 노인' 같다면서 글감이 생겼다고 이미 내 마음을 꿰뚫었다.

참 즐거운 식사시간이었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이런 즐거운 날은 며칠이나 될는지? 내가 살아본 인생은 기쁜 날은 며칠 되지 않고 나머지 날은 그 기쁜 날을 위해서 사는 것 같다.

내 딸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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