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1) 가을볕 좋은 날에 있었던 일

등록 2004.10.11 14:26수정 2004.10.1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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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금빛 들판의 벼지킴이들

황금빛 들판의 벼지킴이들 ⓒ 박도

“가을 하늘 공활한데….”


사흘 간 서울에서 머문 후 어제(10일) 다시 안흥으로 내려왔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가사처럼 정말 가을 하늘이 쪽빛처럼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이 높으며, 볕이 좋은 날씨였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공기도 맑아지고 들판의 벼들이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논들이 더 많이 펼쳐졌다. 아내나 나나 혼자 다닐 때는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둘이 함께 다니고 짐이 있을 때는 승용차로 오간다.

아내는 고속도로 통행료라도 아낄 양인지 서울나들이에는 거의 대부분 국도나 지방도를 이용했다. 고속도로와는 달리 이 길을 달리면 여유가 있어서 좋다. 날씨 좋은 날이면 차창을 열어놓고 시원한 공기를 쐬기도 하고, 앞과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차창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여태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호기심도 많고 감탄하는 일도 많다.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언저리 경치에 감탄하면 아내는 주차하기 좋은 곳에다 차를 세운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나가 그 경치를 촬영하거나 농사꾼이나 마을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기를 잘 한다.

6번 국도를 타고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를 지나는데 벼가 무르익은 논에 허수아비 30~40개 정도가 서 있었다. 벼논 서너 자락에 이렇게나 많은 허수아비는 처음 보아서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적당히 만든 게 아니라 하나 하나가 작품이었다. 참새들이 눈이 부셔서 도저히 이 부근에는 얼씬도 못할 것 같았다.


a 이제 거두어 달라고 고개숙인 벼들

이제 거두어 달라고 고개숙인 벼들 ⓒ 박도

농가에서는 지금이 벼 거두는 가장 알맞은 때이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처럼 가장 분주하고 바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를 타고 달려도 들판에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콤바인이 드문드문 벼논을 누비면서 익은 벼들을 거둬들이고 있다.

지난날 농가에서는 추수하는 날이 잔치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여느 때는 잘 먹지 않던 비싼 고기반찬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며칠 전부터 하늘을 봐 가면서 미리 타작 날을 정해 두고 품꾼을 구한다.


벼 베는 날, 남정네가 새벽같이 들로 나가면 집에 있는 여인네들은 아침 새참, 저녁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다. 참이나 점심이 준비되면 그것을 밥고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가서 논두렁에다 펴놓고 일꾼들을 대접한다.

내가 차창을 바라보면서 "논두렁 밥맛은 꿀맛으로, 그때 먹었던 특히 갈치조림 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맴돈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전 횡성농민회 회장댁 벼 베는 날이라며 가 보기로 했다면서, 당신 소원 풀고 가자고 곧 금대리 마을 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a 농촌 어린이가 줄어든 탓으로 자연학교가 된 유현초등학교 금대분교

농촌 어린이가 줄어든 탓으로 자연학교가 된 유현초등학교 금대분교 ⓒ 박도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지도자가 보고 싶다

국도에서 5분여 달리자 '금대자연학교'가 나왔다. 이곳은 전 유현초등학교 금대분교였던 바, 농촌학교 학생수가 감소한 탓에 지난해 폐교되자 성당에서 대여 받아 농민교육장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a 귀농학교 실습생들의 현장학습

귀농학교 실습생들의 현장학습 ⓒ 박도

a 지금 벼논에는 온통 콤바인이 추수하고 있다

지금 벼논에는 온통 콤바인이 추수하고 있다 ⓒ 박도

그곳에서는 횡성여성농민회 회원들이 오늘 불교귀농학교 현장학습에 참가한 30여 명의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는 거기서 점심 준비를 하고, 나는 다른 회원의 차를 타고 벼 베는 현장으로 갔다.

막 현장에 도착하자 참으로 오랜만에 지난날 낫으로 벼를 베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30여 명의 남녀 회원들이 낫을 들고 일일이 벼 포기를 잡고 벼를 베었다. 대부분 낫질이 서툴렀지만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벼 베는 일이 끝나자 일꾼들은 점심밥을 먹기 위해 농민회장 농막으로 갔다. 곧 승합차로 배달된 점심을 각자 취향대로, 양대로 떠다가 먹었는데(뷔페식), 한 회원이 큰 양푼에다가 밥을 비비기에 매우 먹음직해 보여서 나는 거기에 끼어들었다.

a 농막에서 점심을 드는 실습생 가족들

농막에서 점심을 드는 실습생 가족들 ⓒ 박도

a 밤나무 밑에서 알밤 줍는 모녀

밤나무 밑에서 알밤 줍는 모녀 ⓒ 박도

a 시내에서 천렵하는 이들

시내에서 천렵하는 이들 ⓒ 박도

a 도리깨질로 들깨를 추수하는 농사꾼

도리깨질로 들깨를 추수하는 농사꾼 ⓒ 박도

식사가 끝나자 도토리 그늘에서 낮잠을 청하는 사람, 밤나무 밑에서 알밤 줍는 모녀, 한편에서는 족대를 들고서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는 이도 있었다.

요즘 단풍도 한창 제철인 행락의 계절인데도 굳이 가족과 함께 농촌을 찾아 땀을 흘리는 그들이 보기에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들깨를 도리깨질로 타작하는 광경에 차를 멈췄다. 생들깨 냄새가 코끝에 감도는 것이 참 좋았다.

그곳에서 우천면을 거쳐 안흥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프장 건설 결사반대!’, ‘쌀 개방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가 텅 빈 산길 들길에 저 혼자 펄럭거렸다.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은 자유지만 좁은 국토에 백두대간조차 마구집이로 파헤치면서 꼭 골프장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농번기에는 농촌에 와서 함께 추수하고 막걸리 잔을 나누며 쇼가 아닌 진짜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그런 사람을 우리의 지도자로 모실 수는 없을까?

지난날 “나는 골프를 치면 공조차 오른쪽으로만 날아간다”라는 골프광이 국정의 중요한 책임자가 되었으니, 그 사람 접대에 눈도장 찍으려고 너도나도 골프채를 휘두르고, 좁은 국토는 회복키 어렵게 파헤쳐졌다.

“그 나라 지도자는 그 나라 백성들의 의식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우리 모두 곰곰 곱씹을 말이 아닐까.

a '제3회 안흥찐빵 한마당 큰잔치' 한 장면

'제3회 안흥찐빵 한마당 큰잔치' 한 장면 ⓒ 박도

안흥에 이르자 ‘안흥찐빵 한마당 큰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조그마한 마을이 사람들로, 차들로 온통 뒤덮였다. 이 행사를 주관한 마을협의회 관계자들이 예년보다 더 성황이었다고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면사무소 앞 무료 시식 코너에서 찐빵과 국을 맛본 후 향토 장터로 가서 메밀부침과 메밀로 만든 촌떡을 사서 아내와 같이 나눠먹었다. 행사장을 한바퀴 돌다가 노씨 내외를 만나 저녁으로 국밥을 먹은 후 돌아왔다.

참 가을볕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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