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에서 농장주로 변신한 제따

[귀향 이주노동자 이야기] "힘들지만 재미있다. 재미있지만 힘들다"

등록 2004.10.22 00:45수정 2004.10.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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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득 1만5천달러 이하 나라 NGO 활동가들은 모두 브로커야.”


언젠가 국제원조 관련 기관에서 일했던 선배가 아시아 지역 NGO들을 지칭하면서 늘어놨던 말이다. 그 선배는 90년대 초 네팔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서구 선진국에서 파견된 숱한 NGO들과, 네팔인들이 세운 NGO들을 가까이 볼 기회가 많았다고 했다.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 자신이 판단한 바에 따르면, 제 3세계 NGO 활동가들 중 대부분 실속은 없이 해외에서 무상원조나 얻어 보려고 생색이나 내는 단체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도 그 기준에 의하면 똑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물으며, 1만5천달러라는 기준을 어디에서 따왔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쳐 모든 저개발 혹은 개도국 NGO 활동가들을 폄하하는 것이 결코 온당치 못하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올 가을 나는 자신의 경험에 비쳐 저개발 국가 NGO 활동가들을 폄하하거나,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부 편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사람을 두 번씩이나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한 번은 지난 9월 중순 서울에서 열렸던 ‘제 9회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에서였고, 또 다른 한 번은 이번 달 11일부터 15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던 ‘제 3회 이주노동자 저축과 대안투자 회의’에서였다.


그 사람은 필리핀 이주노동자 출신 활동가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운라드 까바얀(Unlad Kabayan)'이 민다나오 지역에서 운영 중인 농장을 책임지고 있는 제따(Zetta)였다.

제따는 대학 졸업 후, 줄곧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로 활동하다가 해외이주노동을 떠났던 다소 이채로운 경험을 갖고 있다.


a 언제나 웃는 얼굴인 제따(맨 앞)

언제나 웃는 얼굴인 제따(맨 앞) ⓒ 고기복

제따가 해외이주노동을 가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고 한다. 홍콩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친구가 가볍게 권유한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당시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NGO 활동가로 일하던 제따가 해외 이주노동자로,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가정부’로 일하러 나가는 것을 다들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제따는 여러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해외이주노동을 택했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다시 NGO 활동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정부로 일하던 홍콩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제따는 많은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여러 해 동안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했지만 정작 돌아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고, 돌아가고 싶어도 본국에 벌어놓은 돈도 없고, 일할 자리도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제따는 홍콩의 ‘아시아이주노동자센터(AMC)’ 활동가들과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심 끝에 제따는, 오랜 해외 생활을 하면서도 귀국 후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규모 저축모임을 권하기 시작했고, 저축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공동 출자하여 각고 끝에 농장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시작한 그 농장은 아시아 지역 이주노동자들의 귀국 후 재정착을 위한 모범사례로 인식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국민의 50%가 이주노동자들이 송금하는 돈에 의지한다는 필리핀에서는 귀국한 이주노동자들 혹은 귀국을 준비하기 원하는 사람들과 이주노동자 가족들이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제따의 활동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a 해외이주노동자 전용 창구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

해외이주노동자 전용 창구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 ⓒ 고기복

나는 농장에서 일하느라 일반적인 필리핀인들보다 더 검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제따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지 물어 보았다. 대답은 간단했다. 농장 건립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현재까지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It's difficult, but fun. It's fun, but difficult"("힘들지만 재미있어, 재미있지만 힘들어“)

간단하게 답해 놓고는 까르르 웃는 모습이 참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힘들지만, 즐겁게 하는 제따의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제따는 가정부에서 농장주로의 멋진 변신을 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농장 경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은 아직까지 기대치를 밑돈다고 한다. 그래도 제따는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은 미래를 위해 투자했고, 그 투자에 대한 기대를 나눠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혹 자신의 시도가 실패한다고 하더라고 그 실패는 다른 사람들이 희망이라는 나무를 심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하던 제따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힘들지만 재미있게 일할 줄 아는 멋쟁이! 제따는 나로 하여금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체가 이주노동자여야 된다는 분명한 인식과 제3세계 NGO 활동가들의 헌신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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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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