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은 꿈

[커밍아웃2] 국가보안법이 영영 사라지길 바라며...

등록 2004.11.16 17:51수정 2004.11.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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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도 나고 얼굴은 빨갛고 늑대탈을 썼다. 채찍을 마구 휘두르면서. 교과서에 나온 이런 장면이 내 뇌리엔 박혀 있었다.
뿔도 나고 얼굴은 빨갛고 늑대탈을 썼다. 채찍을 마구 휘두르면서. 교과서에 나온 이런 장면이 내 뇌리엔 박혀 있었다.김용철
꿈 하나 - 꿈이 사라진 사회


꿈은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미지의 세계이거나 미래다. 펼쳐지는 배경에서만큼은 가끔 과거일 때도 있다. 어떤 이는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도 한다. 꿈은 자면서도 꾸고 멀쩡하게 깨어 있으면서도 꿀 수 있지만 현실의 꿈은 바람이나 이상, 또는 대박이 터지거나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다.

성취되지 않을 허망한 그 무엇이기도 하고 때론 믿기지 않게 이루어져 인생역전의 짜릿한 쾌감을 준다. 하지만 언제나 꿈은 저 멀리에 있다.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쉬 잡히지 않는다. 설혹 잡히더라도 신기루처럼 날아가거나 살을 꼬집어보면 내 것이 아닐 때도 있다.

우리에게 꿈은 과연 무엇인가. 희망인가. 좋은 꿈 한번 꿔보고 싶은 게 꿈일까? 우리는 많게는 하루 서너 번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기도 하고 단편으로 짤막하게 끝나기도 하는 꿈을 꾼다. 한 달 동안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살아간다. 어찌나 넋을 놓고 사는 삶인지 현실에서 꿈도 잃고 사는 게 다반사다.

꿈은 길몽도 있고 악몽, 흉몽도 있게 마련인데 대개 길몽은 덩캐덩캐 따라다니는 돼지새끼를 보았을 때다. 임신을 알리는 태몽도 있다. 나는 사춘기 시절 몽정(夢精)을 꿀 땐 그냥 그대로 있었다. 그 짜릿한 쾌감을 즐기면서….

흉몽일 때는 사정이 다르다. 악몽(惡夢) 또는 흉몽(凶夢)은 귀신이 따라다니며 발을 잡고 놓지를 않거나 고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추락하기도 한다. 고무신을 큰물에 떠나보내 잃어버린 어릴 적 꿈, 그 지긋지긋한 뿔 달린 간첩이 가죽 혁대를 이리저리 흔들며 못살게 굴기도 한다.


꿈은 언제나 고향 마을 그 어디에서 시작되었다. 돌아갈 수 없어서 일까. 아직 컬러풀(colorful)한 꿈 한번 꿔보지 못해 아쉽지만 내가 꾼 꿈 중에 간첩이 나오는 그 꿈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꿈 둘 - 가장 꾸기 싫은 어릴 적 꿈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내 마을 아랫부분에는 너럭바위라고도 하고 마당바위라고도 부르던 바위가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호박쪼가리를 바구니에 담아 널러 다녔던 곳이다.

바위 앞을 지나자 늑대가 닭을 몰며 가죽 채찍으로 좌우로 흔들며 몰고 가는 상황과 너무나 흡사한 광경, 지독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머리엔 뿔이 달려 있고 옷은 누렇다. 누런 옷 위에 벨트와 휘장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얼굴은 온통 빨갛다. 빨갱이들은 어머니 아버지, 동네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한 데 모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서는 "휘리릭~" 저으며 살쾡이 닭 다루듯한다.

차마 맘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실눈으로 슬며시 볼라치면 "휙휙" 지나가는 가죽 끈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니 호박 널러 갈 때나 '삐비' '찔구' 뽑아 먹으러 다닐 때도 그 자리를 지나치려면 송장이나 귀신보다도 빨갱이-간첩이 산모퉁이에서 툭 튀어나올까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꿈 셋 - 초중고 내내 따라다녔던 꿈

내 악몽은 현실에도 반영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던 봄 방학 며칠 전 일이다. 수요일에 민방공 훈련이 있던 날이었다. 사이렌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은 벌써 멀찌감치 달려 나가는데 나는 신발이 없어 한참을 헤매며 울다가 맨발로 꽁꽁 언 학교 뒤로 가서 세 시간이나 높다란 논둑 아래에 엎드려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 망령은 잊을라치면 중학교 때도 백아산 차일봉으로 떨어지는 낙하산이 일깨워 줬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고2 때 KAL858기가 사할린상공 러시아에서 격추되자 학교 기숙사에 자고 있던 내 머리 위로 김일성 괴뢰도당 폭격기가 밤마다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식은땀 범벅이었다.

다 큰 놈이 그랬다. 대학입학 시험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3학년 때까지 그리했으니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모질고 모질다. 질긴 그놈의 간첩과 뿔 달린 빨갱이…. 있지도 않은 정신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내 유년과 청소년기는 그렇게 악몽이 지배하며 밤마다 헛소리를 해댔으니 그 나이에 반공 교육을 잘 받은 나는 민주화 유공자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며 충성을 맹세했고 괴뢰집단을 쳐부술 궁리로 가득했다. 겨레와 나라에 이바지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금운동도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 해소마냥 사이클이 맞지 않아 드글드글 끓던 라디오에선 간혹 인왕산 두꺼비를 괴뢰(傀儡)라 했고 찬가도 흘러 나왔다. 남쪽 교실에선 북괴(北傀)로 가르치고 내 소중한 동무(同務)들을 모두 친구(親舊)로 바꿔 놓았다. 우리 마을에도 반공방첩탑(反共防諜塔)이 해마다 새 단장을 했다.

시베리아, 중원을 바라보며 실크로드로 날고 싶은 호랑이를 살립시다. 웅비의 조국을 위해 장막은 걷어야 합니다.
시베리아, 중원을 바라보며 실크로드로 날고 싶은 호랑이를 살립시다. 웅비의 조국을 위해 장막은 걷어야 합니다.김용철
꿈 넷 - 사상의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다

대학에 들어가 사회를 알아나간 뒤로는 또 다른 망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잠 한번 두 다리 쭉 펴고 자지 못했다. 안기부 요원이 언제 와서 잡아갈지 모르기에 문을 두 번 세 번 걸어 잠그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 세상이 몽유병이 걸린 듯 악몽의 연속이다. 악몽을 꾸다가 퍼뜩 깨어나서는 다시는 잠을 청하고 싶지 않다. 자고 싶지 않아 뒤척이다가 행여 잠들까봐 꼬집어도 본다. 북쪽으로 머리를 대고 자면 안 좋은 꿈꾼다고 방향을 바로잡아 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이 파괴한 건 내 육신과 정신 둘 다였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책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서점에 버젓이 팔리는 데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나 사회, 식민지, 자본주의, 혁명, 전략, 전술, 종속이론, 사상, 이론이란 표지 글자만 보여도 불심검문에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갔다. 소중한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줄줄이 들어갔다.

나는 대학에 다니며 특이한 경험을 했다. 바로 '생활도서관 운동'이다. 겉으로 보기엔 생활을 강조한 도서관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생활도서관은 이른바 '운동권'을 1차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검열 받지 않은 책과 문건, 비디오테이프, 영화, 팸플릿, 포스터까지 망라한 사상학습처였다.

그곳엔 시, 소설, 수필에 인문사회과학 학습을 위한 교양서부터 원전 번역서까지 총 5만권 넘는 책이 있었다. 서문만 읽지 말고 끝까지 읽으라 했다. 박노해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보려거든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먼저 보라고 했다. 그게 공부라고 했다.

나는 정면 대응을 택했다. 어차피 대중을 만나는 것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하자는 것이었다. 끌려가더라도 내가 끌려간다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공연하게 이용자들에게 내 이름과 내 주장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얼마나 편협한 사람들에게 탄압받고 있는지 돌아보자고 했다.

"학문사상의 자유, 진보적 사상의 대중화"가 구호가 된 건 당연하다. 누구든 머리로는 어떤 사상이든 접할 수 있어야 하고 지성인은 공부한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금서와 불온서적에 당당하게 '00대학교 생활도서관'이라고 도장을 쾅쾅 찍었다. 최소한 안전보장을 위한 조치였다.

한 명 두 명 잡히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00명, 1000명, 1만명이 잡혀가 감옥을 내 동지들로 빼곡히 차서 넘치게 하고 싶었다. 운동의 '운'자도 모르던 신입생들은 과나 동아리 선배들이 도서대출증 하나 끊어주며 학습을 시켰다.

대학도서관 그 많은 장서 중에 볼만한 것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들 관심을 채워줄 자료 몇 개는 금기시 되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서 생활도서관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주말과 방학 때도 40여 석밖에 안 되는 작은 도서관이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안군
새벽녘 대학 구내로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들어와도 수위 아저씨는 도서관이라며 극구 제지해 끄떡없었다. 국내 최초로 <파업전야>를 비롯해 북한 영화 <소금> <꽃 파는 처녀> <피바다>가 상영되었지만 늘 안전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실제 아는 운동권 몇몇이 잡혀 들어가자 연락이 왔다. 변론 증거로 생활도서관 도서를 쓰겠다고 한다. 대학 도서관에 버젓이 있는데 이게 무슨 이적표현물이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냐며 당당히 법원에 제출해 달라는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면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대중들의 관습이 법을 상대로 진검 승부를 벌일 판이었다.

자료 20여 권이 제출되었고 검사 콧대를 보기 좋게 눌렀다. 그 운동권 친구는 무죄로 풀려나 지금은 방송계에 떳떳이 진출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 한때 '민중정보센터'를 만들겠다는 내 꿈은 접어야 했다.

꿈 마무리 - '기득권안보법'을 지키려는 그들의 꿍꿍이

그들은 언제나 체제 전복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체제가 위태롭다고 국가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를 놓고 말하지 않아도 정권 안보에 혈안이 된 그들은 막무가내로 잡아갔다. 모진 고문에 조작이 이어졌다. 그래도 정의가 승리하고 민주주의는 서서히 사람들 마음을 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더니 국가안전기획부는 학원사찰이나 노동계 감시에서 손을 떼고 대외활동을 전담하는 국가정보원으로 탈바꿈했다.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내 젊은 시절은 저당잡힌 채 갔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 길고 지루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던가. 그래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가 전복도 일어나지 않았고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결코 밀리지도 않았다. 밀리면 전쟁을 들먹이고 평화를 주장했던 정권 담당자들도 거의 물러갔다.

간곡히 부탁한다. 그 법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차라리 내 머리를 잡아 가둬라. 내 머리엔 그 때 그 사상이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테니까.

내 소원이자 꿈도 마찬가지다. 우린 벌써 많은 시간을 보내고 2004년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다. 세상이 변했다.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망령이자 올가미 하나가 사라지지 않고 엄연히 버티고 있다. 이젠 정권안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국가보안법 하나를 두고 정치권이 사람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왜일까? 단 하나다. 기득권. 이마저 빼앗기면 자신들이 수십 년 동안 이뤄왔던 당당하지 못한 권력과 부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란 위기감이다. 그들은 결코 국가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을 둘러싼 이익집단의 재산권 지키기 또는 생존전략일 뿐이다.

구시대 유물을 보존하는 것을 교묘히 포장하여 눈속임을 한들 누가 모를까 보냐. 국가보안법 없이 이 나라를 지키기 힘들다면 이 나라를 떠나라. 그도 싫다면 수호할 생각 자체를 버려라. 이 시대의 양심과 민주세력, 독수리5형제면 충분하다.

우리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악마를 계속 집안에 두면 어찌되는가를…. 이제 그 소임을 다한 휴지조각을 왜 붙들려고 하느냐 말이다. 진실로 구린 데가 없다면 왜 잡고 놓지 않으려 하는가. 발버둥치는 그 속셈을 만천하에 공개하라. 난 그것이 알고 싶다. 거짓말탐지기를 들이대기 전에 말이다.

50년 동안 사랑하는 이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러는지들…. 역사발전을 더디게 하거나 저지하려는 사람들 사상이 더 의심스러운 것 아닌가?

정말 푸닥거리라도 해야 할까 보다. 살풀이 한판으로 이 어둠을 벗고 싶다. 지긋지긋한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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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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