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중원을 바라보며 실크로드로 날고 싶은 호랑이를 살립시다. 웅비의 조국을 위해 장막은 걷어야 합니다.김용철
꿈 넷 - 사상의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다
대학에 들어가 사회를 알아나간 뒤로는 또 다른 망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잠 한번 두 다리 쭉 펴고 자지 못했다. 안기부 요원이 언제 와서 잡아갈지 모르기에 문을 두 번 세 번 걸어 잠그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 세상이 몽유병이 걸린 듯 악몽의 연속이다. 악몽을 꾸다가 퍼뜩 깨어나서는 다시는 잠을 청하고 싶지 않다. 자고 싶지 않아 뒤척이다가 행여 잠들까봐 꼬집어도 본다. 북쪽으로 머리를 대고 자면 안 좋은 꿈꾼다고 방향을 바로잡아 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이 파괴한 건 내 육신과 정신 둘 다였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책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서점에 버젓이 팔리는 데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나 사회, 식민지, 자본주의, 혁명, 전략, 전술, 종속이론, 사상, 이론이란 표지 글자만 보여도 불심검문에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갔다. 소중한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줄줄이 들어갔다.
나는 대학에 다니며 특이한 경험을 했다. 바로 '생활도서관 운동'이다. 겉으로 보기엔 생활을 강조한 도서관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생활도서관은 이른바 '운동권'을 1차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검열 받지 않은 책과 문건, 비디오테이프, 영화, 팸플릿, 포스터까지 망라한 사상학습처였다.
그곳엔 시, 소설, 수필에 인문사회과학 학습을 위한 교양서부터 원전 번역서까지 총 5만권 넘는 책이 있었다. 서문만 읽지 말고 끝까지 읽으라 했다. 박노해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를 보려거든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먼저 보라고 했다. 그게 공부라고 했다.
나는 정면 대응을 택했다. 어차피 대중을 만나는 것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하자는 것이었다. 끌려가더라도 내가 끌려간다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공연하게 이용자들에게 내 이름과 내 주장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얼마나 편협한 사람들에게 탄압받고 있는지 돌아보자고 했다.
"학문사상의 자유, 진보적 사상의 대중화"가 구호가 된 건 당연하다. 누구든 머리로는 어떤 사상이든 접할 수 있어야 하고 지성인은 공부한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금서와 불온서적에 당당하게 '00대학교 생활도서관'이라고 도장을 쾅쾅 찍었다. 최소한 안전보장을 위한 조치였다.
한 명 두 명 잡히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00명, 1000명, 1만명이 잡혀가 감옥을 내 동지들로 빼곡히 차서 넘치게 하고 싶었다. 운동의 '운'자도 모르던 신입생들은 과나 동아리 선배들이 도서대출증 하나 끊어주며 학습을 시켰다.
대학도서관 그 많은 장서 중에 볼만한 것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들 관심을 채워줄 자료 몇 개는 금기시 되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서 생활도서관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주말과 방학 때도 40여 석밖에 안 되는 작은 도서관이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