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원짜리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요?"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4> 서울일기<12>

등록 2004.11.18 14:04수정 2004.11.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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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탑골공원 옆 초라한 식당에서 팔던 오백 원짜리 국밥이 생각난다/사진은 내가 끓인 김치국밥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탑골공원 옆 초라한 식당에서 팔던 오백 원짜리 국밥이 생각난다/사진은 내가 끓인 김치국밥이종찬
1986년 초겨울, 서울에 올라와 첫 번째 맞이하는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탯줄을 끊고 나오면서부터 이십대 중반까지 따스한 남쪽나라에서만 살았던 내게 영하권을 맴도는 서울의 매서운 추위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니,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매섭고도 낯선 추위였다.


학습지를 정기구독하는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거리에 나서면 절로 온몸이 움츠려들면서 입김이 허옇게 뿜어져 나왔다. 손발이 시리고 귀가 따끔거리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면 담배연기가 입김인지 입김이 담배연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이상하게 배도 자주 고팠다. 예전에는 돈주고 먹으라고 해도 먹기가 싫었던 감자탕, 낙원상가 골목길에서 허연 김을 피워 올리며 팔팔 끓고 있는 그 감자탕이 그렇게 맛나 보일 수가 없었다. 구수한 멸치 다신 물 내음이 풍기는 분식집을 지나칠 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허연 칼국수가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서울 종로 낙원상가 옆에 있는 '○○교육원'에 다니면서부터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오전에 학습지 판매에 따른 교육을 받은 뒤 엽서를 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다 보면 이내 점심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슬쩍 빠져나와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으로 때울 수도 없었다.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학습지 선생님들끼리 어울려야만 했다. 그래야만이 그들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주워 들을 수도 있었고, 간혹 재수가 좋으면 학생 한 명을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식당에 들어가면 제가 시켜먹은 것을 따로 따로 계산했지만 매일 드는 점심 값도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요즈음 계속 허탕만 치는데 오늘은 오백원짜리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요?"

"에이~ 김 선생님! 오백원짜리 국밥을 파는 데가 어디 있나요. 라면도 한 그릇에 오백원씩 받는데."


"따라오세요."


나와 같은 지역인 신림동과 봉천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선생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탑골공원 옆 허름한 골목 안에 있는 조그만 식당이었다. 근데, 놀랍게도 그 식당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식당 문 양쪽에는 '우거지국밥 한 그릇 500원'이라는 빨간 글씨가 정말 거짓말처럼 써 있었다.


식당 밖까지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머리 희끗희끗한 6~70대 남짓한 할아버지들이었지만 간혹 우리들처럼 넥타이를 점잖게 맨 샐러리맨들도 제법 끼어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서울 바닥 한복판, 그것도 정치 1번지라고 하는 종로통에 500원짜리 국밥을 파는 집이 있었다니.

"오백원짜리 국밥이라고 깔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한번 먹어 보세요. 이게 보기보다 얼마나 맛이 있는데요."

"이야~ 다다익선이네. 정말 이렇게 장사가 잘되면 금세 빌딩도 세우겠네. 대체 하루에 몇 그릇이나 판답니까?"

"놀라지 마세요. 하루에 천 그릇은 예사로 판대요."

"그래요? 근데 이렇게 값싸고 맛있게 만드는 비결이 뭘까요?"

"그걸 알면 제가 이런 식당을 하나 차리고 말죠."


우거지에 소뼈인지 돼지뼈인지를 넣고 끓여낸 그 집 국밥은 정말 국물도 시원했고 맛도 깔끔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은 국밥을 들고 있다가 자리를 잡는 즉시 눈 깜빡할 새 먹어치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밥을 먹는 동안 등 뒤에서 또 다른 손님, 마치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가 눈치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그 집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나 또한 그때부터 점심값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어떤 날은 저녁을 때우기 위해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그 집으로 가기도 했다. 특히 조금 늦은 저녁 무렵 그 집에 가면 손님들이 많이 없어 국밥을 식사와 안주로 삼아 막걸리까지 덤으로 마실 수도 있었다.

"요즈음 왜 뜸 해? 어디 좋은 데라도 생겼어?"

"아… 아닙니다. 요즈음 조금 바빠서."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다녀야지. 이 모든 게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거린데. 그래? 요즈음은 할 만 하지?"

"네. 이게 다 어머님 덕분 아닙니까."

"어머님? 그거 참 듣기 좋은 소리네."


그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림동 국밥집 아주머니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사실, 신림동 국밥집 아주머니는 내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서울은 남쪽과는 달리 겨울이 몹시 춥다며 내의까지 사 주신 것은 물론 서울에 피붙이 하나 없는 내게 어머니처럼 식의주까지 모두 마련해 주셨으니까.

"앞으로 학생들이 조금만 더 늘어나면 웬만한 월급쟁이도 부럽지 않을 텐데…"

"너무 욕심 부리지 마.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도 있잖아. 그렇게 차근차근 열심히 하다 보면 학생들 불어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야. 그리고 위만 자꾸 쳐다보지 말고 아래도 가끔 쳐다봐."

"그러고 보면 저도 참 속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을 조금 가지면 더 많이 갖고 싶어 안달인 걸 보면."

"사람이 그런 욕심조차도 다 버리면 어떻게 살아?"


그랬다. 그해 초겨울부터 나는 서서히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매달 학습지를 건네주고 잠깐잠깐 가르치는 학생들의 성적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내게 학습지도를 받으려는 학생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꾸만 불어났다. 매일 즐거운 비명을 마구 질러야 할 그 정도로.

게다가 늘 무언가 채워주기만을 기다리던 빈 지갑도 눈에 띄게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교육원에 매일 나가지 않았다. 한 달에 서너 번씩, 새로운 교재가 나올 때만 그곳에 들렀다. 그리고 오전에는 책을 읽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썼고, 오후가 되면 학생들을 가르치러 다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어! 선생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 언제 서울에 올라왔는가?"

"좀 됐습니다."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는 한번 나가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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