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열린 부산상고 '동창회'

[取중眞담] '동창회' 수준의 대규모 행사 연 것은 이례적

등록 2004.11.25 18:17수정 2004.11.25 18:51
0
원고료로 응원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이 들려준 참여정부 출범 초창기 때의 얘기이다.

하루는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이 수석비서관을 관저로 불렀다. 권 여사는 이 수석과 차를 한잔 마시면서 방 한쪽에 쌓아놓은 서류더미를 가리키며 가벼운 푸념을 했다. 부산상고 동문들이 대통령께 보내온 이력서들인데 대통령은 인사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면서 들여다보지도 않고 있다는 '불만'섞인 푸념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이 수석비서관은 "그것은 노 대통령께서 정말 잘하시는 것이다"면서 노 대통령을 적극 '두둔'했다. 이 수석은 "실제로 노 대통령은 조각 당시 장관급 몇 사람을 추천한 것 빼고는 인사에 관여하지 않았다"면서 노 대통령의 인사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동창회' 수준의 대규모 행사를 청와대 안마당에서 연 것은 이례적

그런데 노 대통령이 지난 11월 7일 모교인 부산상고 동문 200여명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 초청해 다과회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구설에 올랐다. 청와대 녹지원 잔디밭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노 대통령은 동문들과 일일이 사진촬영을 하고 인사말을 통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잘 운영할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대선에서 사회 각 분야의 부산상고 동문들은 음으로 양으로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도왔다. 노 대통령도 취임 이후 신세진 동문들을 기수나 출신지 별로 나눠 10여명씩 청와대로 초청해 사적인 식사모임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대선자금 지원이 문제되어 구속된 문병욱 썬앤문 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대통령도 개인사가 있기에 지난 대선에서 신세를 진 동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동창회' 수준의 대규모 행사를 청와대 안마당에서 연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이번 행사는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한행수씨가 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돼 '학맥인사' 논란이 불거진 직후에 열렸다는 점에서 뒷말이 적지 않다.

청와대측은 이에 대해 "이날 행사는 청와대 의전비서실에서도 모를 만큼 비공개, 사적 행사였다"면서 이런 모임에 언론이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모임의 성격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대통령은 '사적인 자리'를 가지면 안되냐는 항변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중에 목포상고 동문을 초청해 청와대에서 동창회를 가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청와대와 참석자들 "문제될 것 없다"면서도 이날 행사에 대해서는 '쉬쉬'

또 청와대 일부에서는 "부산상고 동문회들이 일요일에 청와대 관람을 와서 대통령이 잠깐 가서 얼굴을 비친 것인데 그것이 뭐 문제냐"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날 행사에 대해 '6하 원칙'에 의거해 사실관계를 분명히 확인해 달라는 요청에는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청와대측의 이런 인식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우선 청와대는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관람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의 청와대 관람이 금지된 일요일에 녹지원에서 행사를 갖는 것부터가 일종의 '특혜'다. 또 '사적인 자리'라면 그날 행사의 다과회 비용을 누가 댔는지도 해명해야 한다.

"문제될 것 없다"고 하면서도 청와대와 참석자들이 이날 행사에 대해 '쉬쉬'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우리가 남이가…청와대서 부산상고 '남 몰래 동문회'"라는 제목으로 이 행사를 처음 보도한 국민일보에 따르면, 부산상고 동문들도 대부분 “잘 모르겠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반면에 부산에 본부를 둔 총동창회 사무실 간부는 “재경동창회에서 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른다”고 했고, 재경동창회 간부는 “총동창회가 추진했고, 부산 동문들이 올라왔다”고 거꾸로 말했다고 한다.

일부 동문들은 인사 '역차별'을 호소하기도 한다. 일부 동문은 "대통령(53회)도 동창회비 내는 것 외에는 도와주는 게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동문의 다수가 요직에 '진입'한 것은 사실이다.

상고의 특성상 부산상고 동문이 금융권 등 경제계에서는 두각을 나타냈으나 정부 산하기관을 포함해 정·관계 진출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청와대에서는 노 대통령의 '집사' 역할을 한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54회)이 유일한 부산상고 출신이었다.

청와대에서 열린 '동창회'는 관료사회의 인맥·학맥 분위기 조성을 가속화

그러나 올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노 대통령의 3년 선배인 한행수 주공 사장의 임명 이전에 지난 7월에는 노 대통령의 5년 선배인 윤광웅 청와대 국방보좌관(48회)이 국방장관에 기용됐다. 또 청와대에는 동기인 차의환 혁신관리비서관(53회), 1년 후배인 오정희 공직기강비서관(54회), 그리고 권찬호 청와대 제도관리비서관(62회)이 잇따라 포진했다.

더욱이 공직기강비서관은 인사 검증을 총괄하고 있어, 부산상고 출신이 공직후보 추천과 검증의 핵심 포스트를 장악한 셈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한때 운영했던 생수회사 '장수천'의 대표를 지낸 홍경태씨(61회)가 총무비서관실 수송담당 3급 행정관으로 기용된 것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다.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 노 대통령으로는 인사문제와 관련해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정부에서의 경험칙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는' 관료조직의 생리는 그렇지가 않다.

청와대에서 열린 '동창회'는 그런 인맥·학맥 분위기 조성을 더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2. 2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3. 3 [단독] '윤석열 문고리' 강의구 부속실장, 'VIP격노' 당일 임기훈과 집중 통화
  4. 4 이시원 걸면 윤석열 또 걸고... 분 단위로 전화 '외압의 그날' 흔적들
  5. 5 23만명 동의 윤 대통령 탄핵안, 법사위로 넘어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