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밉을 때마다 해바라기 씨 까묵어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6> 해의 꽃 '해바라기'

등록 2004.11.29 15:31수정 2004.11.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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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씨알 콕콕콕 박힌 해바라기
까만 씨알 콕콕콕 박힌 해바라기이종찬
"빛나야! 저게 무슨 꽃이지?"
"저것도 꽃이야?"
"저게 해바라기란다. 지금은 비록 꽃이 말라 붙어 씨앗만 남았지만 꽃이 피어 있을 때는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꼭같이 생겼단다."
"근데, 왜 저 꽃 이름을 해꽃이라 하지 않고 해바라기라고 붙혔어?"
"저 꽃에 얽힌 전설 하나 들려줄까?"



그리스 신화에 보면 바다를 다스리는 포세이돈이란 신이 있었단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다음으로 힘이 센 그런 신이었지. 그 포세이돈에게는 '님프'라고 부르는 어여쁜 두 딸이 있었어. 포세이돈은 두 딸 님프를 너무나 아낀 나머지 밤에만 밖으로 나가서 놀 수 있게 했지.

그날 밤에도 님프 자매는 집 밖으로 나가 달님과 별님을 동무 삼아 놀다가 그만 해가 뜨는 줄도 몰랐어. 이윽고 동녘에서 찬란한 해가 떠오르자 님프 자매는 난생 처음으로 태양의 신 아폴론을 바라보게 되었지. 그 순간 님프 자매는 자신들도 모르게 아폴론에게 마음을 몽땅 빼앗기고 말았어.

그때 첫 눈에 아폴론에게 포옥 빠진 첫째 님프 '크리티(Clytie)'는 동생도 자기 이상으로 아폴론에게 폭 빠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단다. 크리티는 아폴론을 혼자 차지할 욕심에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달려가 동생이 해가 뜨도록 놀았다고 일러 바쳤지. 그 말에 놀란 포세이돈은 둘째 님프를 집에 가두고 말았어.

이제 아폴론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된 크리티는 아버지 포세이돈 몰래 낮에도 집 밖으로 나와 아폴론이 자기만을 사랑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단다. 하지만 아폴론은 그런 첫째 님프를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 태양의 신이었던 아폴론이 크리티의 그런 욕심을 모를 리가 없었거든.

임금을 향한 충절, 양지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꽃, 해바라기
임금을 향한 충절, 양지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꽃, 해바라기이종찬
"그래서?"
"그런 줄도 모르고 크리티는 아폴론만 애타게 바라보며 하루 속히 아폴론이 자기만을 사랑해 주기를 기다렸지."
"욕심꾸러기!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다가 그만 해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가 되고 말았다는 거야."


조선 선비들이 '향일화'(向日花)라 부르며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에 비유했다는 해바라기. 해를 따라 돈다고 하여 부나비처럼 양지만 쫓아 다니는 조삼모사한 사람들을 일컫기도 하는 해바라기. 페루의 나라꽃이자 '태양의 꽃' '황금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해바라기. 천재 화가 고흐가 파란 하늘에 피어난 해바라기의 강렬한 노란빛에 포옥 빠졌다는 그 꽃.


내 어릴적 고향집 장독대 옆에는 장독의 짝꿍처럼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나 장독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장독대의 울타리처럼 촘촘촘 서 있었던 그 해바라기는 언뜻 바라 보면 장독대를 지키는 장승 같았다. 된장과 간장이 담긴 장독에 둘러처진 노오란 새끼줄(금줄)에 매달린 빨간 고추를 지키는 지킴이처럼 그렇게.

하지만 나는 해바라기를 바라볼 때마다 햇살처럼 둥글게 둥글게 피어나는 노오란 해바라기꽃보다 해바라기 꽃씨가 먼저 떠올랐다. 꽃이 시들 무렵 동그란 해바라기 얼굴을 손으로 슬며시 문지르면 이내 촘촘촘 드러나는 까아만 꽃씨. 그냥 까먹으면 약간 비릿한 맛이 나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먹던 그 까아만 씨앗… 씨앗들.


그 당시 우리 마을 아이들은 그렇게 볶은 해바라기 씨앗을 호주머니에 한 주먹씩 넣고 햇살 잘 드는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나락을 까 먹듯이 톡톡 까먹었다. 나 또한 눈깔사탕이 떠오를 때마다 해바라기 씨앗 한 알을 입에 넣어 이빨로 씨앗의 끝을 톡 터뜨렸다. 그러면 이내 자그마하고 땅콩처럼 고소한 알갱이가 혀끝을 간지럽히곤 했다.

해바라기 씨앗을 갈아 설탕과 함께 타먹으면 변비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해바라기 씨앗을 갈아 설탕과 함께 타먹으면 변비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이종찬
"너거들 뭐로 자꾸 참새처럼 까먹고 있노?"
"해바라기 씨아입니꺼. 좀 드리까예?"
"고마 됐다. 너거들이나 많이 묵어라. 근데 너거들 해바라기 씨로 너무 많이 묵으모 나중에 설사병 만난다이~."
"묵어도 묵어도 자꾸만 묵고 싶은 거로 우짤낍니꺼. 고매(고구마)는 하도 많이 묵어가(먹어서) 질리서(물려서) 못 묵것고."


사실, 우리 마을에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의 집안에 먹을 것들이 제법 많았다. 밭에서 금방 캔 고구마뿐만 아니라 김장을 하기 위해 밭에서 뽑은 통통한 가을무, 배추를 다듬고 남은 고소한 배추 뿌리 등 매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먹거리가 우리들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해바라기 씨앗처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군것질을 하고 싶을 때마다 심심풀이로 먹는 간식이 아니었다. 해바라기 씨앗은 한 주먹만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하루 종일 먹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해바라기 씨앗은 아무리 먹어도 고구마나 무처럼 배가 부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혀끝에 감도는 고소한 맛이 정말 좋았다.

간혹 마을 어르신들은 장독대 옆에 전봇대처럼 서 있는 해바라기의 긴 줄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잘 말려 삼베에 싸서 보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동그란 꽃대에서 까만 씨앗을 받아 기름을 짜거나 덕석 위에 나락처럼 길게 널어 놓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때마다 씨앗이 알차고 큰 것을 골라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두곤 했다. 내년 봄에 다시 장독대 옆에 심기 위해서.

"해바라기 씨도 약으로 쓰입니꺼?"
"그걸 말이라꼬 하나. 해바라기 씨 이거로 도구통(절구통)에 콩콩 찧어가꼬 설탕을 넣고 물에 타 묵으모 똥구녕 막힌 데 그만 아이가. 그라고 기침이 심할 때 해바라기 줄기에 들어 있는 하얀 속 이걸 파내가꼬 묵으모 금방 멈춘다카이."
"그라모 해바라기 이기 만병통치약이네예."
"오데 약이 되는 기 해바라기뿐이더나. 산과 들에 널린 기 약 아이더나. 그라고 아무리 그래 싸도(그렇게 말해도) 밥만한 만병통치약도 없는 기라."


비음산 아래 밭둑에 줄줄이 늘어선 해바라기
비음산 아래 밭둑에 줄줄이 늘어선 해바라기이종찬
그 당시 몹시 가난했던,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을 돈조차 귀했던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산과 들에 나는 풀이나 갖가지 열매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 중 약이 된다는 풀이나 열매들은 잘 말려서 보관하거나 절구통에 빻아 한약처럼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리고 누군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약재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눈을 가지게 있었다. 그리고 길가에 흔하디 흔하게 자라는 풀이나 나무들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이 될 수가 있는 것들이며, 그 때문에 함부로 짓밟거나 꺾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아나!"
"이기 뭐꼬? 해바라기 씨 아이가."
"누가 디기(많이) 밉을 때(미울 때)마다 해바라기 씨 이거로 한 개씩 까묵어 봐라. 땅콩보다 훨씬 더 꼬소한 맛이 솔솔 날 끼다."
"그라모 니가 밉을 때는 우짜꼬?"
"문디 가시나! 그때는 퍼뜩 찬 물로 한 바가지 마시고 정신을 챙겨야지."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해바라기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해바라기이종찬
그래. 요즈음도 나는 길을 가다가 고개를 푹 수그린 해바라기를 바라보면 주인이 있든 없든 가까이 다가가 까만 해바라기 씨앗을 한 주먹 받고 싶다. 그리하여 그때처럼 때깔 좋은 씨앗은 잘 보관했다가 다가오는 봄 장독대 옆에 심고, 나머지 씨앗은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며 까먹고 싶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얄밉기만 한 이 세상을 향해 입에 문 해바라기 씨앗의 껍질을 퇘, 하고 내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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