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오뎅국물처럼 따뜻했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6> 서울일기<13>

등록 2004.11.25 14:08수정 2004.11.2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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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나는 위태로운 바위에 뿌리 박은 소나무처럼 서울의 시멘트 바닥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나는 위태로운 바위에 뿌리 박은 소나무처럼 서울의 시멘트 바닥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이종찬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도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신경림 '눈 온 아침' 모두


1986년, 그해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하지만 그해 서울의 겨울은 헐벗은 가로수처럼 온몸이 덜덜덜 떨리면서도 마음은 오뎅국물처럼 따뜻했다. 마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 서서 발을 동동 굴리며 허연 입김과 함께 뜨거운 오뎅국물을 후루룩 후루룩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지난 여름, 부산역에서 영등포로 오는 밤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온 나는 땡겨울이 되어서야 서울의 시멘트 바닥 위에 잔뿌리를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학생들 또한 거리 곳곳에 늘어나는 포장마차처럼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지리도 누가 물으면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낯을 많이 익혔다.

이대로 별 탈 없이 내가 맡고 있는 학생들만 잘 관리한다면 서울에서의 삶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매달 쬐끔씩 쬐끔씩 저축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전셋방도 하나쯤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만 바람이 쑤욱쑥 쑤욱쑥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울에서 식의주만 해결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었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문학의 길은 자꾸만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곧장 문학의 길로 내달릴 수도 없었다. 답답했다. 그냥 이렇게 아둥바둥거리며 살 바에야 차라리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맑고 투명한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자꾸만 뻐져나가는 문학의 바람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문학과 함께 활활활 타오르고 싶었다. 그렇게 타오르다가 문득 까만 재가 되어 차디찬 겨울바람에 훠이훠이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점점 꺼져가는 내 문학의 불꽃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 나는 봉천전철역 주변에 있는 봉천시장에 앉아 오뎅을 안주 삼아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된 문학의 불꽃을 활활활 태울 수 있을 것인지, 그리하여 내가 태우는 시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한 쌀밥 한공기로 남을 수 있을 것인지, 곰곰히 생각했다.

"정규화 형은 어디 있습니까?"
"몰라. 만난지 꽤 됐어. 내가 한번 알아볼까? 그나저나 박선욱 시인을 한번 만나보지 그래. 자네하고 나이도 비슷할 테고."
"아, 그거 참 잘 됐네요. 그렇찮아도 박선욱 시인이 묶은 <한국노동시선집>에 제 시가 몇 편 실리기도 했는데…."
"그래. 그 친구를 통하면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과도 곧바로 연결될 수 있을 거야. 그 친구가 자실에 자주 들락거리거든."


그때, 봉천시장에서 정말 우연찮게도 만난 사람이 강00 선생이었다. 강 선생은 그 당시 청소년과 관련된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니, 대표를 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강 선생은 내가 마산에 있을 때 창동에 있는 사회과학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막걸리를 한 잔 나누었던 그런 사이였다.

나는 강 선생을 만나자마자 소주를 권하며 정규화 시인부터 찾았다. 정규화 형은 1949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8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신작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으로, 한때 마산에 내려와 1년 가까이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정규화 형과 툭 하면 마산 부림시장 지하에서 소줏잔을 기울이곤 했다. 사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부터 나는 정규화형을 만나려 애썼다. 그리고 이름 깨나 날리는 서울의 문인들을 소개 받아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그 분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래. 요즈음 무얼하며 어떻게 살고 있나?"
"학습지를 돌리며 애들 좀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쎄. 그게 밥줄이 되나?"
"그래도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사는 편입니다."
"그래. 앞으로 자주 만나세. 내가 나가는 사무실이 바로 요 위에 있어. 고시촌 아래 말이야."


그제서야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식의주 때문에 내 마음 속에서 점점 사그라들던 문학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내 문학의 길 위에 뭔가 희미하게 가물거렸다. 아니, 이대로 마음의 고삐를 죄며 곧장 다가서기만 하면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그 무언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강 선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꽤 늦게까지 소줏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그 소주가 정말로 사그라들던 내 문학의 불꽃을 다시 지펴주고 있었다. 학생이 한 명 불어나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시가 되어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자네, 다음에 자실에 가게 되면 채광석 선생을 꼭 만나 봐. 채광석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자네가 가고자 하는 문학의 길이 좀더 또렷하게 보일 거야."
"사실, 저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채광석 선생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네. 점심 때 우리 사무실에도 가끔 들리게. 사무실 주변에 순대국밥을 아주 잘하는 집이 있거든."


강 선생과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밤 1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봉천시장 밖에서는 때 이른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강 선생과 헤어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싸락눈이 싸락싸락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캄캄한 하늘에서 싸락눈이 미리내처럼 수많은 빛을 발하며 내게로 내게로 쏟아져 내렸다.

그래. 오늘 봉천동의 가난한 지붕 위에 싸락싸락 소리를 내며 내리는 저 싸락눈은 내 문학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나는 저 등불을 따라 하얀 싸락눈 위에 내 문학의 발자국을 하나 둘 찍으며 조심스레 걸어갈 것이다. 내리는 저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할 때까지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느릿느릿 걸어갈 것이다. 혹은 재빠르게.

그날 나는 싸락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헐벗은 가로수처럼 오래 오래 서 있었다. 가난한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는 봉천동 산동네를 바라보며, 아까 먹다 남은 깡소주를 자꾸만 마셨다. 그때 문득 내 시가 보였다. 덕지덕지 기운 옷을 입은 내 시는 가난한 산동네 비좁은 골목길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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