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위가 되는 것은 어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11> 서울일기<15>

등록 2004.12.16 14:24수정 2004.12.1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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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가게마다 석유난로를 제쳐두고 연탄난로를 들여놓고 있다
요즈음 가게마다 석유난로를 제쳐두고 연탄난로를 들여놓고 있다이종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모두


손이 시렸다. 아침마다 살얼음 조각 둥둥 떠다니는 찬물에 쌀을 씻다 보면 손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수도꼭지에서 금방 쏟아지는 물을 받아 쌀을 씻었다면 그렇게 물이 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마다 수도가 꽁꽁 얼어붙어 수도꼭지조차도 아예 돌아가지 않았다.

노오란 냄비 속에 든 쌀을 대충 씻어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나는 곧바로 밤새 연탄불 위에 올려두었던 노오란 양동이를 들고 다시 공동 수돗가로 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뜨거운 물을 수도 파이프에 부었다. 한동안 그렇게 수도 파이프를 녹여야만 수도꼭지가 돌아가면서 물이 찔찔찔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저녁마다 큰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미리 받아 두었다. 그래야만이 바쁜 아침시간에 서둘러 쌀을 씻고 세수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연탄 불구멍을 활짝 열어 아침밥을 짓고 나면 곧바로 연탄을 갈아 끼워야만 했다. 자칫 연탄불을 갈아 끼울 때를 놓쳐 연탄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다시 연탄불을 피우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번개탄이란 게 있었지만 번개탄이 뿜어내는 지독한 가스와 뿌우연 연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전경이 쏘아대는 최루탄 연기를 정면으로 맞는 것만 같았다. 눈물 콧물을 훔쳐가며 치직치직 소리를 내는 번개탄을 연탄 아궁이에 넣고 연탄구멍을 잘 맞추어 연탄을 올려놓아도 새 연탄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어쩌다 새 연탄에 불이 붙어도 연탄 불구멍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금세 연탄이 다 타버리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나는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에 학습지를 돌리다가도 몇 번이나 달셋방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특히 찬바람을 몰고 다니며 하루 일을 마치고 달셋방으로 돌아왔을 때 연탄 아궁이가 썰렁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불 꺼진 싸늘한 연탄아궁이에 허기처럼 허연 재만 덜렁 남은 연탄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 두 장씩 나오는 연탄재를 치우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혹여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연탄재를 치우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좁은 복도식 부엌이 더욱 배 고프고 궁상맞게 여겨졌다.

"저런저런! 쯧쯧쯧. 가난하고 애궂은 생명이 또 저렇게 가는구먼. 하여튼 겨울만 되면 연탄가스 때문에 큰 문제야. 참! 총각도 집에서 연탄 떼지?"
"네. 그렇찮아도 연탄불이 하도 자주 꺼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습니다."
"불구멍 조절을 잘 해야지. 밥을 할 때는 연탄 불구멍을 4개 정도 열고 그 다음에는 1개만 열어놓으면 하루에 2장이면 돼. 방이 조금 춥다 싶으면 2개 정도 열고."



그랬다. 그 당시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사람이 참 많았다. 뉴스시간만 되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하룻밤새 일가족이 몽땅 다 죽었다거나, 젖먹이 아이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그런 슬픈 소식이 자주 들렸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대부분이 나처럼 허름한 달셋방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 유행어가 '밤새 안녕'이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사 간 그 달셋방은 2층 건물에 방을 시멘트로 새롭게 넣은 곳이어서 방바닥에서 연탄가스가 샐 염려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연탄보일러도 새 것이어서 그런지 연탄 불구멍을 조금만 열어두어도 방이 몹시 따뜻했다.

물론 연탄가스는 갈라진 방바닥으로만 새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연탄아궁이가 있는 방문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와 소중한 목숨을 잃을 때도 있었다. 또한 그렇게 죽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탄을 잠들기 직전에 갈아 끼우고 잠이 들었다가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당했다.

"총각도 조심해야 돼. 그리고 연탄이 다 타지 않았더라도 잠들기 한두 시간 전에 미리 연탄을 갈아 끼우도록 해. 연탄 한두 장 더 아끼려고 하다가 큰 일 날 수도 있으니까."
"제가 이사 간 집은 새집이라서 괜찮습니다."
"늘 그렇게 안심하고 있다가 사고가 난다니까. 그리고 자기 전에 반드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문지방 앞에 놔두고 자. 알았지?"


그때부터 나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 방문 앞에 두고 잤다. 혹여 방문 옆에 달려 있는 연탄 아궁이에서 가스가 방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게 정말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그런 이야기인지도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던 그 당시 사람들은 방안에 물을 떠놓으면 방안으로 새어든 연탄가스가 물에 녹아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게다가 지금처럼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를 달아놓은 집은 없었다. 가스보일러는커녕 기름보일러만 하더라도 아주 부잣집에 가야만 겨우 구경할 수가 있었다.

나 또한 연탄보일러가 달린 연탄 아궁이가 그지없이 고마웠다. 연탄 아궁이는 연탄보일러를 통해 방만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이 아니라 밥과 찌개, 국도 끓여먹을 수가 있었다. 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석유곤로에 밥과 찌개, 국 등을 끓여먹었지만 겨울이 되면 석유를 살 필요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서글펐다. 그때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옆 달셋방에는 신혼부부가 마치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아니, 서로 방세를 절약하기 위해서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잘 몰랐다. 특히 아침에 혼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옆방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는 나를 더욱 서글퍼게 했다.

"그 처녀는 대체 누굽니까?"
"왜? 그 처녀가 마음에 들어?"
"아뇨. 그런 멋쟁이 처녀가 저처럼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과 어디 어울리기라도 하겠습니까?"
"청춘이 구 만리 같은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내가 보기에는 키도 크고 얼굴도 이쁘장한 게 총각한테 딱 어울리겠더만."


그 처녀가 대체 누구지? 나는 이 시린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애가 탔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자꾸 그 처녀를 내게 짝지우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분명 그 처녀는 국밥집 아주머니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처녀임에 틀림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예쁜 처녀가 국밥집 아주머니의 가까운 친척의 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 그 처녀가 친척집 딸이라도 됩니까?"
"아, 그 처녀에 대해서 자꾸 묻지만 말고 총각 속내부터 털어놔. 어때? 그 처녀를 한번 만나볼 거야?"
"글쎄요? 제 처지가 이래서…"
"그러지 말고… 그냥 총각이 내 사위가 되는 것이 어때?"
"네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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