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10회)

등록 2004.12.27 10:11수정 2004.12.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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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놀랍게도 오후에 만났던 채유정이었다. 그녀가 긴장된 낯빛으로 김 경장을 올려 다 보고 있었다. 얼굴이 홍시 빛으로 달아오른 채 눈 주름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여기엔 웬일이에요?"

"박사님의 서재에서 찾을 것이 있어요."

"찾을 것이라뇨? 이번 살해와 관련된 것인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핏발 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수갑을 계속 채우고 있을 건가요?"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수갑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전 범인인줄 알았습니다. 범죄 현장을 다시 살피려는 것으로 생각했죠."

채유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 무릎이 시큰거리네요."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괜찮아요. 저도 범인을 잡을 단서를 얻을까 해서 여기에 왔으니까요."

"범인을 잡을 단서라뇨?"

"박사님은 분명 엄청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하신 지가 사흘이 채 되지 않았죠. 그리고는 살해되신 겁니다. 시기가 묘하게 딱 떨어지지 않나요?"

"범인이 그 것을 찾으려고 살해를 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죠."

"그 반대라……."

"박사님이 돌아가심으로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박사님이 찾았다던 그 무엇을 위한 단서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말이군요."

"현재로선 여길 뒤지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낮에는 공안들이 지키고 있어 밤에 몰래 들어왔던 겁니다. 제겐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열쇠가 있거든요."

둘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을 같이 뒤졌다. 채유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손전등을 입에 물고 흩어진 종이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김 경장은 박사가 찍어 놓은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산과 능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적 발굴지가 잔뜩 벽에 붙어 있었지만 박사의 모습은 사진에 없었다.

책을 살피던 채유정이 김 경장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함부로 사진을 찍어놓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이 많은 책과 문서 중에서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요?"

"한 가닥 희망을 놓칠 순 없죠."

김 경장은 서재 한구석에 놓인 탁자 위를 살폈다. 오후에 살폈을 때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치워놓고 없었다. 문득 중국 공안들을 향해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건 현장을 이렇게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해당한 지 만 하루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의 허술한 수사 방식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 경장은 이마에 손을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바닥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창문 쪽에서 삐거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빗소리는 아니었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이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다. 김 경장은 종이 조각을 살피고 있는 채유정의 손목을 이끌고 욕실 뒤로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이 집안에 들어오고 있어요."

'공안이 아닐까요?"

"공안이라면 창문 쪽으로 들어올 리가 없죠."

창문이 열리고 바닥에 몸을 내디디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 경장은 자물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번갯불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그 불빛에 검정 옷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제법 크게 보이는 식수 통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검은 복면을 얼굴에 쓰고 손전등을 켰다. 김 경장은 얼른 문을 열고 나가려다 그를 좀더 지켜보려 했다. 그를 잡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좀 더 지켜보다가 잡아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채유정도 미세하게 문이 열린 틈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둘이 바짝 붙어서 서로의 숨결이 가늘게 느껴졌다. 채유정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엄청나게 증폭되어 들리는 듯 했지만 밖의 사내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거센 빗방울 소리가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밖의 사내는 커다란 식수 통을 꺼내 들더니 그 내용물을 바닥에 끼얹고 있었다. 문득 강한 신나 냄새가 전해졌다. 이럴 수가…… 사내가 들고 있는 것은 물통이 아니었다. 강한 휘발성의 신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방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끼얹었지만, 특히 그가 목표로 삼고 있는 곳은 서재인 듯 했다.

그 일이 끝나자, 그는 현관 쪽으로 돌아가서 성냥갑을 꺼냈다. 이어 성냥 긋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성냥불을 신나가 적시고 있는 바닥에 던지기 전에 잠시 그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가 불꽃에 흘려 잠시 뜸을 들이고 있던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둘은 얼른 문을 열고 그자에게 덤벼들었다. 김 경장은 상대의 다리 사이로 몸을 날렸다. 채유정은 사내가 들고 있는 성냥불을 두 손바닥으로 눌러 껐다.

"어이쿠."

사내가 쓰러진 틈을 타, 그가 쓰고 있는 복면을 벗기려는 순간, 성냥불의 불씨가 바닥에 떨어졌다. 불이 온전히 꺼지지 않은 것이다. 바닥에 떨어지자 말자 불길이 확 솟았다. 그리고는 바닥을 타고 옆으로 번졌다.

"얼른 불부터 끄세요."

채유정은 입고 있던 레인코트를 벗어 바닥을 덮었고, 김 경장은 발을 구르며 불을 껐다. 다행히 신나가 묻어 있는 곳이 적어 금세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가 창문 쪽으로 몸을 디밀고 있었다. 김 경장이 얼른 달려가 가의 한쪽 다리를 꼭 붙들었다. 사내의 몸이 거의 밖으로 나와 있고, 다리만 실내에 잡혀 있는 형국이었다.

김 경장은 한쪽 손으로 다리를 붙잡은 채 사내가 쓰고 있는 복면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나 사내는 김 경장의 힘이 분산된 틈을 놓치지 않고 한쪽 다리로 위를 걷어찼다. 김 경장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아악-."

김 경장이 옅은 신음과 함께 뒤로 넘어졌고, 그 사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동안 채유정은 현관문을 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길거리로 나와 달아나고 있는 사내의 뒤를 쫓았다.

"저 사람 잡아요!"

그렇게 외쳤지만 비오는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자의 몸으로 그를 쫓아가기에는 무리였다. 남자는 비가 거세게 내리는 골목 한쪽 끝으로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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