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11회)

등록 2004.12.29 10:31수정 2004.12.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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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외곽에 위치한 한 노천카페.

따가운 햇살이 깨진 유리창처럼 쏟아지고 있어 거리에 사람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파라솔 밑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주먹만한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기온은 높았지만 날씨가 건조한 탓에 그늘에서는 어느 정도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스프레소를 다 비운 사내는 탁자에 놓인 신문을 집어들었다. 그가 제일 먼저 펼쳐든 곳은 사회면이었다. 사회면 한쪽에는 오늘 새벽에 발생한 뺑소니 교통사고에 관한 기사가 인쇄되어 있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의 사진까지 실려 있는데, 그가 표적으로 삼았던 자가 분명했다.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사내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블록을 더 걸어 버스 정류장 옆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빨간 색의 전화 부스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전화 부스 안은 더웠지만 사내는 땀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는 이어 열개 가까운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와 연결되었다.

"여기의 첫번째 임무는 해결하였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럼 마지막 두번째가 남은 것인가?"

"그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할 것입니다."

"한치의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고 있다."

사내가 급히 물었다.

"문제라뇨?"

"한국에서 온 경찰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그 정도라면 우리 쪽 사람을 이용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네가 처리한 일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불을 지르려고 했다가 그 한국 경찰 때문에 제지 당한 채 몸을 피해야만 했다."

순간 사내의 얼굴 한쪽 근육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미간 사이도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침중한 어조를 수화기 속에 밀어 넣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그곳에 가서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기에는 그쪽 일이 더 급하다. 만약 그자가 입을 벌린다면 우리가 준비해 온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어서 그 일부터 처리하고 즉시 귀국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무거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부하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그들이었다. 그런데 어이없이 실수하고 만 것이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와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길바닥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이 일을 처리해 오지 않았던가?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불안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몇 가지 일만 더 마무리 지으면 앞으로 그들이 원하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전화 부스에서 나온 그는 얼른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겨 버스에 올라탔다. 다섯 코스를 지나서 내리자 한적한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고 2층 이상의 건물도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 입구에서 좁은 골목 안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러자 어제 돈을 건넸던 그 백인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악수를 청해 왔지만 사내는 차가운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그가 다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기브 업 머니."

나머지 돈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대답 없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발목 언저리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순간 햇빛이 그의 왼팔 소매 끝에 비추면서 강렬하게 반사됐다. 백인은 흠칫 놀라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리고는 몸을 뒤틀면서 오른손을 등뒤로 돌렸다. 하지만 그는 등에 꽂아 놓은 칼을 꺼낼 수 없었다.

햇빛이 한순간 잘려나갔다고 느끼는 순간, 검은 포물선이 눈앞에 그어진 것이다. 이어 백인의 오른손은 몇 차례 버둥대다가 바닥에 손을 짚고 말았다. 뜨겁고 끈적한 느낌이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갔다.

"동양인을 믿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백인은 핏발 선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내의 오른손에서 날카로운 금속이 햇빛을 예리하게 조각 내고 있었다. 백인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와 함께 내장이 흘러나오는 것을 아득히 지켜보며 눈을 감고 말았다.

사내는 손수건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발목에 묶어둔 칼집에 넣었다. 따가운 햇살의 파편이 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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