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12회)

등록 2004.12.30 15:07수정 2004.12.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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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동네 우범자의 소행일 겁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동네 우범자가 왜 물건을 털지 않고 불을 지르려 했다 말입니까? 그것도 살해된 장소에서 말예요."

김 경장은 심양시의 공안국에서 그렇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제복을 입은 공안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아예 귀찮아 하는 것 같았다. 김 경장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채유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쪽 구석의 의자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된 채 눈주름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공안들은 간단한 조서만 꾸밀 뿐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왜 우리 허락도 받지 않고 살해 장소를 함부로 가는 겁니까?"

"전 수사를 해야 하는 경찰입니다."

"여긴 중화인민공화국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통제를 받아야 하오."

"제가 살해 장소를 찾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공안 쪽 책임이 클 텐데요."

그렇게 말하자 공안도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는 이번 일이 크게 확대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현장에 다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쪽을 지킬 인력도 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짐을 받아 놓고 둘은 공안국을 나왔다. 시내의 도로는 밤 안개에 비가 온 뒤끝이라 젖어 있었고, 뿌연 안개가 연막처럼 온 거리를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택시 한대가 곧바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심양 특유의 승합차 모양을 한 택시 한대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히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채유정이 얼른 도로에 나서 택시를 잡았다. 뭐라고 흥정을 한 후에 그녀가 외쳤다.

"어서 올라타세요."

엉겁결에 택시에 몸을 실은 김 경장이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현장으로 다시 가야죠."

"현장에는 왜요?"

"그놈들이 박사님 집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면 분명 거기에 어떤 단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김 경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으로 턱을 고였다.
"우리가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일단 부딪혀 보아야죠."

김 경장은 시계를 보았다. 빛이 어두워 시계의 바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의 깊게 살펴 보니 새벽 4시를 넘기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옅은 두통이 끈질기게 그의 머리에 달라 붙어 있었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그 동안 택시는 심양의 시부대로(市府大路)에 도착했다.

박사가 살고 있는 곳은 3층 건물의 낡은 연립주택이었다. 둘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철근이 생선뼈처럼 튀어나와 흉물스럽게 보이는 그 건물로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는 신나 냄새로 가득했다. 역한 냄새 때문에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둘이 공안국에 가서 법석을 떤 덕분인지 입구에는 두명의 공안요원이 지키고 서 있었다. 둘은 그들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당당히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신나는 휘발성이 강해 냄새만 남아 있을 뿐, 바닥에 고여 있던 내용물은 모두 증발되고 없었다. 천장 귀퉁이에는 벌써 거미들이 줄을 쳐놓고 있었다. 둘은 안으로 들어와 고인의 서재로 향했다.

김 경장은 놈이 창문으로 들어왔던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길 불태우려고 했다면 분명히 어떤 단서가 남아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한참 동안 여길 뒤졌잖아요."

"이렇게 불을 밝게 켜 놓고 보면 아까 찾지 못했던 것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요?"

"결국 단서는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겠군요."

"밤을 새서라도 어떤 단서를 찾아야만 합니다."

채유정이 현관 입구를 살피며 물었다.
"공안들과 같이 찾자고 그럴까요?"

김 경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 하고 있어요. 아마 지금쯤 공안국에 우리가 왔던 사실을 알렸을 거예요."

결국 둘이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서재에 있는 수천권의 책과 수많은 종이 조각을 다 살필 수는 없었다. 다 살핀다고 해도, 거기서 단서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단서는 깊숙이 숨겨 놓지 않았을 것이다.

"손이 자주 가는 곳을 자세히 살펴 봐요."
서재는 네평 남직한 공간에 한평 정도의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벽 한면은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바닥에 쌓아 올린 종이 상자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에 가려 윗부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상자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주로 서적류였다.

상자는 하나하나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다. 모든 상자를 개봉해서 살피려니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작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즉시 손길을 멈추고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들려 왔다. 바닥이나 종이 위를 밟는 듯한 소리였다. 방안에 그들 말고 누가 있는 듯했다.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자들인가? 김 경장은 밖에 서 있는 공안들을 부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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