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의 한 장면지요하
그리고 드디어 정월대보름날을 맞았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두어 놈 데리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연극 선전을 했습니다. 신문지를 구해 말아서 핸드마이크처럼 만들고는, 악극단이나 영화가 들어왔을 때 선전원이 선전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큰소리로 신나게 연극 선전을 해대었지요.
어느덧 정월 대보름달은 휘영청 떠올랐고, 날씨는 매우 온화하여 겨울밤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돕는 듯이 모든 조건이 더없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동네 아주머니들이며 어른들이 마을 어귀 산신령님께 제를 지낼 움막 앞으로 초저녁부터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조명 역할을 해주겠다, 움막 안의 벽에 붙어 있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산신령님 그림이 무대 분위기를 만들어주겠다, 징도 하나 구해다 놓았겠다, 이제는 연극 공연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배역을 맡은 기철이 기목이, 영섭이, 영석이, 정호에다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이 약속된 시간에 모두 모였습니다.
드디어 징이 울리고 연극은 시작되었습니다. 맨 먼저 내가 움막 안으로 등장을 하고, 의자에 앉아서 뭐라고, 뭐라고 독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연극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움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배역을 맡은 아이들이 제때에 등장을 하지 않는가 하면, 다음에는 네가 나갈 차례라느니 내가 나갈 차례라느니 다투지를 않나, 움막 안으로 등장을 하고서도 대사를 까먹은 바람에 우물쭈물해서 김빠지게 하지를 않나, “얀마, 빨리 총을 쏴야지. 빨리 총 안 쏘구 뭐허는 겨?”하고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지를 않나, 연극은 완전히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구경꾼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더욱 재미있어 하고, 그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연극은 끝내 흐지부지 끝인지 뭔지 모르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어른 구경꾼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꼬맹이들이 연극을 할 생각까지 다하고 참 용하다느니, 기특하다느니, 애들이 저러니까 더 사는 맛이 난다느니…. 요즘 말로 하자면 참 영양가 있는 말들이 많았지요.
생각하면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다니…. 추억이라는 것은 결국 덧없는 세월, 인생무상을 반추하게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나는 연극이라는 것을 접할 적마다 으레 소년 시절의 그 한 토막 추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며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짓곤 하지요. 그 추억으로 하여 연극이라는 예술의 한 장르는 내게 좀 더 정다운 것인 듯도 싶습니다.
그 동안 내 나름으로는 연극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방에서 사는 처지임에도 서울로 연극을 보러 간 일도 꽤 많습니다. 유명 연극배우를 인터뷰하거나 지방의 여러 개 극단을 탐방 취재하여 글을 쓴 적도 제법 많습니다.
그리고 더러 연극 대본도 써서 2000년에는 <천안극단>이 내 희곡으로 56회 정기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천안극단>이 내년 정기공연 작품으로 오리지널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최근에 또 한편의 대본을 주었지요.
성당에서 연극 공연을 한 경험도 있답니다. 1980년 성탄 때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천주교 박해시대의 풍경을 그린 연극을 공연한 적도 있지요. 지금은 대개 40줄에 들어선 그때의 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고 멋지게 연기를 했는지…. 그리고 나는 눈을 밟고 시골 마을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옛날 노인들의 갓을 구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생각하면 아련해지는 그때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런 내가 올해 또 한 번 성당에서 연극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23일(금요일) 저녁에 있었던 ‘2004성탄제’ 행사에서 10분짜리 단막 소품을 공연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연극 같은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해마다 성당에서 갖는 성탄제 행사에 참가하는 구역들은 한 결같이 코믹한 분장에 의한 익살이나 무용연기, 또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꾼 노래 부르기가 전부였지요. 그리고 우리 구역은 해마다 노래 말을 바꾼 민요나 가요로 합창을 했는데, 매번 참가인원수로 점수를 따곤 했지요,
올해도 그런 식으로 적당히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성탄제를 불과 며칠 앞둔 날 구역장 자매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는 이웃 구역과 함께 연극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10분 정도 할 수 있는 연극 대본을 써주고 연출에다가 주요 배역까지 맡아달라는 것이었지요.
연말에 즈음하여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이 너무 많아 난감한 마음이었으나 항상 수고가 많은 구역장 자매님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지난 21일 주일 새벽에 A4용지 4장 분량의 극본을 만들고, 20일 저녁에서야 우리 구역장 자매님 댁에 2개 구역 신자들이 다수 모인 가운데서 극복 발표를 하고, 배역을 정하고 소품에 관한 의논을 하였지요.
그러니까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동안 벼락치기로 연습을 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 나는 극본을 만든 데다가 연출도 맡고 주요 배역까지 맡은 바람에, 22일 새벽 서울에 갔다가 서둘러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내려와야 했고….
연극은 한마디라도 대사가 있는 배역은 아홉 명이지만 엑스트라가 많을수록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많은 신자들이 함께 무대에 오를 수가 있었지요. 대사가 있는 배역에 남자 성인 신자도 다섯 명이나 참가했고, 어린이들도 참가하여 겉모습부터 보기에 좋았지요.
대사가 가장 많은 배역은 대천사와 연옥으로 갓 들어온 영혼이었는데, 그 역은 나와 내 제수씨가 맡았지요. 그런데 제수씨는 대사를 열심히 잘 외웠는데, 공연 때는 조금 실수를 하기도 해서 내가 일부러 대본에 없는 대사를 하여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했지요. “대사를 열심히 잘 외웠으나 더러더러 잊어먹기도 하는구나”라고….
연극은 10분에 불과한 짧은 극이었지만 메시지가 분명해서 신자들에게 뭔가를 준 것 같았습니다. 메시지 전달이 잘된 덕인지, 올해의 성탄제는 가슴에 남는 것이 있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