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14회)

등록 2005.01.03 11:41수정 2005.01.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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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는 어둠 컴컴했으나, 곧 눈에 익을 정도의 엷은 어둠이었다. 좁은 서재에는 마호가니 원형 테이블과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수천 권은 됨직한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벽 세 개 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 위로 최저의 조도로 빛나고 있는 전등갓이 천장에 달려 있었다. 그 전등갓 아래 류허우성 교수가 팔걸이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교수는 족히 70은 넘은 듯이 반백의 머리에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데다 검은 저승꽃까지 이마 부근에 피어 있었다. 등이 심하게 굽어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위태롭게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강당 있는 기품이 절로 느껴졌다.


류허우성(劉厚生) 교수

여길 찾아오기 전, 채유정은 류허우성 교수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김 경장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에 처음으로 손을 댄 것은 198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중국 민족 관련사 학술좌담회’가 열렸는데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 탄지샹(潭其梁) 교수가 이 좌담회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의 판도 안에 있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중국에 귀속된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처음 들고 나왔다.

이후 이 이론은 55개 소수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좌담회에서 이를 지지하고 나선 동북지역 역사학자가 바로 그들 앞에 앉아 있는 요녕대학교의 류허우성 교수였다. 그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고구려계인 예맥족은 신라와 백제를 형성한 한족(韓族)과 다른 종족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우리나라 사학계로부터 거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그를 고조선 연구의 대가로 꼽히며 중국 사회과학 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임명했다. 사회과학 연구원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총 지휘하는 일종의 이론을 만들어내는 전략기자나 다름없었다. 거기의 수장이 바로 그들 앞에 앉아 있는 류허우성 교수였다.


살해된 안 박사의 메모철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을 때 채유정은 처음에 글자를 잘못 보았나 싶었다. 안 박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인 그가 막 죽기 전에 메모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정황상으로 보아 편지를 적다 찢어버린 수신인도 그였던 것 같았다.

왜 살해된 안 박사는 죽기 직전 그에게 연락을 하려 했던 것일까? 둘의 의문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들이 류 교수를 찾아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류허우성 교수는 둘을 맞이하여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여태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주위는 조용했다. 침이라도 삼키면 그 소리가 엄청나게 증폭되어 방안에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류 교수는 둘을 한동안 건너다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커튼을 살짝 젖혔다. 이어 탐색하듯 바깥 풍경을 내어다보았다. 박명의 빛이 흘러들어 그의 숱 적고 하얗게 센 머리를 비추었다. 허 교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구멍 난 풀무처럼 쌕쌕 바람 빠지는 소리로 입을 떼었다.

"한 분은 한국 경찰이고, 또 한 분은 안 박사의 제자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살해된 안 박사님과 관련되어 몇 가지 여쭙고자 찾아뵌 것입니다."

류허우성 교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느릿느릿 늘어놓았다.
"아까운 사람이야. 한국 쪽에서 봤을 때는 큰 보물 하나를 잃은 셈이지."

"중국 쪽에서는 오히려 큰 덕이 되지 않는가요?"

류 교수는 대답 대신 가늘게 입술을 씰룩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김 경장이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이 얼마 전에 만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순전히 자신이 짐작한 내용을 의뭉스럽게 늘어놓았다. 류 교수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랬었지."

짐작 대로였다. 둘이 마주 보고는 낮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번에는 채유정이 물었다.
"두 분이 만나셔서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우린 학자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당연히 서로의 논점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던 게지."

"어떤 토론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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