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반 어른들은 첫닭이 울기 전 그 때 쯤이라고 했다.김규환
여타지역과 달리 1970년대 초반 전라도 지역 농촌은 벌써 시골을 떠나 서울 미아리, 하월곡동, 수유리, 왕십리, 화양리, 신당동, 창신동, 신림동, 봉천동 일대 달동네 일원이 되었다. 우리 지역은 70년대 후반에라야 농촌, 시골, 고향, 마을, 큰댁을 남겨두고 남몰래 울며불며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이발소집 딸 화영이를 필두로 몸집이 왜소했던 찡거리 종호와 정용이 치용이 형제, 아버지를 일찍 여읜 형근이, 젊은 우리 마을 이장아들 병주가 차례대로 전학을 갔다. 이제 나머지는 가물가물하여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그렇게 17명이 우리와 헤어졌다.
소중한 친구들은 방학 때나 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떠나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니 그나마 위안이었다. 하지만 동네엔 이마저도 사정을 허락하지 않는 집이 꽤 있었다. 이른바 야반도주(夜飯逃走)였다.
새벽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밤밥’을 먹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도 그 당시 다섯 집이나 있어 그 실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하루, 365일, 5년 아니 10년의 삶이 어찌나 고단하고 궁핍했을까. 논뙈기 밭 한마지기 없던 사람들이다. 만날 남의 논밭 부쳐 먹고 도지(賭地)를 주고 나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마저 남의 것이거나 움집에 들어가 살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