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에 얽힌 이야기

등록 2005.01.17 10:55수정 2005.01.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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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락 넣어 끓인 미역국. 고기를 넣지 않고 버섯 넣은 미역국을 좋아하는 아내 ⓒ 김규환


딸 낳았다고 미역국을 얻어먹지 못한 어머니

셋째로 딸을 낳은 어머니는 아버지께 미역국을 얻어먹지 못했다. 자상했던 아버지가 돌변을 하신 것이다. 주막에 있던 아버지에게 딸을 낳았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시자 "됐어라우"하시며 술만 계속 들이켰다고 한다. 아들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들의 표본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들을 열 명이나 낳겠다고 했으니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열아홉에 시집 와서 스물넷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몇 번이나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외할머니께서는 "김서방, 제발 데리고만 있게. 내가 둘째를 알아봄세"하시며 어르고 달랬다. 외동딸이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여섯 번이나 재를 넘어와서 장사를 임시 휴업하고 석 달 동안 뒷바라지를 하셨던 분이다.

첫 아이 큰형을 6년만에 낳고 3년 후 둘째형까지 내리 아들만 낳기까지 어머니의 수모는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복덩이 누나의 존재는 한동안 넷째인 형을 낳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인고의 시절을 보내고 보기 좋게 아들 둘을 낳았으니 선대에 3대가 독자 집안이었던 아들 부족 현상을 말끔히 해소하는 소원풀이를 했을 법도 한데 그렇게 나오니 어머니의 섭섭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린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어머니의 속내엔 섭섭함 이상이 물씬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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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귀가 붙은 줄기까지 먹었던 시절 심심풀이가 그립다 ⓒ 김규환


미역귀는 내 심심풀이

어릴 적 먹었던 맛있는 미역은 미역귀가 있었다. 등짐을 지고도 모자라 머리에까지 이고 산골짜기까지 미역 팔러 들어온 아주머니들 짐은 나뭇짐만큼이나 부피가 컸다. 가공한 흔적이 없이 말려서 가닥만 잡아둔 미역, 하얗게 쩐 소금기가 남아 있고 잎과 줄기가 섞여 있는 사이사이에 닭 벼슬마냥 오돌토돌 붙은 미역엔 미역귀가 붙어 있다.

내가 미역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어머니 곁에 다가가면 아주머니는 "요고?"하며 미역귀를 "툭" 잘라 내게 주셨다. 짜디짠 귀를 몇 번이나 입에 넣었다 빼면 물러진다. 딱딱하던 미역귀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진다. 쫄깃쫄깃한 미역귀가 탱탱 불어 입에 가득 차면 허기 때우는 맛도 있고 군것질거리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참 맛나게도 먹어댔다. 광방에 넣어둔 미역줄기에 붙은 미역귀는 모조리 내 차지였다.

미더덕미역국과 갈치미역국, 고등어미역국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 영만이와 함께 중학 시절 여자 친구를 찾으러 마산에 갔을 때 먹은 미역국은 기절초풍 그 자체였다.

쇠고기나 닭고기를 볶든가 국물멸치를 빻든가, 마른 명태포를 넣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맹물에 끓였던 미역국만 먹고 살았던 우린 여자친구를 찾느라 어둑해진 저녁에 밥을 먹으러 선술집 같은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밥과 함께 나온 국은 미역국이었다. 이상한 고기가 들어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국을 무턱대고 한 숟갈 푹 떠서 먹고 질금 씹었더니 아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뜨거운 무엇이 입안에서 툭 터져 혓바닥을 데고 말았다. 미더덕이 터진 것이었다.

더군다나 부들부들한 미역국에 그토록 질긴 생선이라니. 생전 처음 먹어 본 미더덕이었다. 여기에 멍게 돌기 부분 껍질도 있었는데 고무를 씹은 듯 질겼다. 씹히지도 않았고 음식 궁합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것에 이런 질긴 것을 넣는 이유가 뭘까?

타지, 그것도 전라도에서 온 촌놈들이 "왜, 미역국에 이따위가 들어있습니까?"하고 따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배고픔만 면하려고 미역과 국물만 먹고 괴상한 생김새에 이상한 냄새까지 나는 생선을 그릇에 그대로 두고 낯선 도시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전라도 촌놈이 마산까지 가서 호되게 당한 미역국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입맛이 아직도 까다롭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 셋째 형은 군복무를 거제도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근처인 외포리에서 했다. 사회생활 경험이 얼마 되지 않은 형은 뭣 달린 놈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철저한 사람이니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입대부터 했다.

출퇴근하던 단기사병이 취사병이었는데 설이 다가오자 밥을 하고 국을 끓이더란다. 고향생각이 간절하던 초년병이었을 때 미역국까지 끓여줬으니 감동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와는 달리 그곳 미역국은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와 형은 비린내라고는 질색을 한다. 미역도 미끌미끌하다고 잘 입에 대지 않는다.

글쎄 그곳 방위, 취사병이 끓인 미역국에는 비린내 풀풀 나고 비늘과 기름이 동동 떠다니는 갈치 토막이 들어 있었다. 가까스로 넘어오려던 것을 참고 한술 떠서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다고 한다.

생물도 아닌 갈치토막을 넣고 끓인 미역국이라니! 이후 취사병은 한술 더 떠서 고등어든 뭐든 비린내 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마구 넣고 끓여서 형은 신참 때 포동포동 쪄야 하는 살이 오히려 더 빠지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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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서 산 옛날 미역 한 가닥. 미역귀를 몇개나 얻어 먹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가공되지 않은 미역이 맛있다. ⓒ 김규환


미역국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아이 낳은 어머니가 먹어야 한다

해강이와 솔강이는 이모를 잘 둔 덕에 낳자마자 셋째 이모 댁에 있었다. 넷째 딸인 아내는 산후조리도 예전 못지않게 호강을 맘껏 누렸다. 처형은 아이 목욕을 도맡아 동생이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게 배려했다.

그뿐이던가. 평소 4녀 2남 6남매간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며 좋은 집안에 장가들어 행복했는데 처형은 아내에게 하루 다섯 끼니 미역국을 끓여줬다. 아내가 석 달 동안 먹었던 미역 봉지가 대체 몇 개였을까?

아내 말에 따르면 장모님은 늘 자식들 낳은 날이 되면 다리가 저리고 뼈마디가 쑤시며 힘이 축 처지고 일할 의욕을 잃는다고 한다. 첫째인 큰 딸이 쉰을 바라보는 나이고 뒤늦게 본 34살 먹은 막내아들이 장가를 가지 않은 데서 그런 게 아니다.

까닭 없이 딸 넷에 아들 둘 그러니까 여섯을 낳았던 날이 다가오면 아프시다는 것이다. 일흔이 넘고 시골에서 농사만 직살나게 했던 장모님 살아온 과정과 연세로 보아 가만히 있어도 마디마디 온몸이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을 테지만 그 때마다 아프다고 하시니 출산 후유증이라는 결론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며칠 전 첫아이인 해강이 6번째 생일이었다. 그런데 보름 전부터 아내 얼굴이 푸석푸석해지고 수척해보였다. 추운 날씨 때문일까. 기력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무기력하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손이 덜 가는데도 이러니 남편으로서 뭐라도 잘못했는가 싶어 뜨끔했다. '돈 못 벌어다 주는 내 탓이지 뭐'하며 나를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필요한 건가. 내가 속 썩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그거야. 정답을 찾았어. 산후통이야! 후유증이란 말이지.'

아이를 낳은 엄마는 한두 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늙어죽을 때까지 그 날만 되면 귀신같이 아플 수밖에 없다. 이 아픔은 다친 상처가 비나 눈만 오면 멍해지고 쑤시는 고통보다 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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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생일인지 모르겠다. 해강이는 찬밥, 솔강이는 자기 생일인줄 알고 한글이와 세종이도 생일 케잌을 서로 차지하려하고 있다. 지금 우리들의 귀염둥이는 시골 큰댁에 가있다. ⓒ 김규환


돌려서 생각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늙을 때까지 언제나 생일엔 잊지 않고 미역국을 끓였다. 그 이유는 뭘까. 아이 속을 편안하게 풀어주려는 것일까? 왜 생일 당사자인 아이가 미역국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 거나 푸짐하게 차려서 먹이면 될 것을 꼭 떡과 미역국을 주는가 말이다. 바쁜 세상에 떡은 사라지고 아직 미역국이 남아 있는 건 왜일까.

내 짧은 생각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뭔가를 착각하고 살았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농경사회에서 실제로는 어머니 당신이 겉으로 드러내 놓고 미역국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밭에서 김매다가 뛰어와 아이를 낳고, 낳은 지 사흘째부터 찬물을 손에 묻히기도 하거니와 농번기에는 논일도 마다 않고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까닭에 응어리를 풀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대가족이 살면서 자신의 몸 하나 챙기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에 대한 할머니들의 마지막 배려는 자식들 생일에라도 미역국을 직접 끓여 식구들이 나눠 먹을 때 한번 후루룩 먹게 하겠다는 깊은 뜻이었으리라. 조상들의 지혜를 엿보는 쾌거다.

이제 나는 2005년 새해 한 가지 다짐을 하고 또 한 가지 교육을 하려고 한다. 아이들 생일날 꼭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주리라. 잊고 지나가더라도 일주일 이내에 맛있는 미역국을 대령하겠다. 이건 내가 아이들이 만 18살이 될 때까지 지속하리라.

그 이후로는 생일상만 받아먹는 아이들에게 제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라고 할 작정이다. 진실로 생일상을 받을 자격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열 달 283일 동안 뱃속에 넣어뒀다가 산고 끝에 낳았으니까. 산후조리 제 아무리 잘했던들 평생 뼈와 살, 치아가 약해지는 우리들의 엄마, 아내는 하루하루 약해지고 있다.

진즉 이런 생각을 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철이 들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하지만 내겐 두 아이의 엄마인 아내가 있다. 오늘 내일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 한 근 끊어다가 한가하게 미역국이나 끓여야겠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고향인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ㅠ>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고향인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ㅠ>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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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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