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손꾸락을 짤라부렀어라우"

[70년대 사람과 삶 6]찬바람에 여물 무던히도 썰던 소년들

등록 2005.01.17 17:13수정 2005.01.1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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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작두 아가리를 벌리고 여물을 썰던 70년대 고향. 이 장면은 친구들끼리 퇴비 증산을 위해 풋나무를 썰던 모습입니다. ⓒ 신안군

봄에 형들이 보낸 돈으로 드디어 우리 소를 샀으니 어느 해보다 정성껏 길렀다. 아버지 몰래 퍼다 준 쌀겨 사료 때문인지 가을엔 송치를 벗어나 먹는 양도 무척이나 늘었다. 꼴로만 배를 다 채워줄 수 없어 콩깍지, 고마리와 갈대 등 거친 풀을 닥치는 대로 먹여도 되지만 나는 잘고 맛있는 바랭이 씨앗이 맺힌 고운 풀을 골라 베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송아지는 꼬리로 쇠파리를 쫓으며 나를 반긴다. 되새김질을 쉬지 않고 하는데 옆에서 본 우리 집 소는 배가 훌쭉 꺼져 있었다.

"쇠양치(송치 또는 송아지의 사투리)야 쫌만 지달려. 이 성아가 소깨잘(과자처럼 생긴 풀과 나무의 중간인 붉은 줄기의 소꼴)을 썰어줄텡께. 알겠제?"

발을 굴리며 응대를 한다. 함께 산 지 여섯 달을 훌쩍 넘긴 때라 내 말을 거의 알아듣는다.

하루하루 어깨가 탁 벌어져 반반하고 허리가 매끈하게 쭉 빠진 몸매를 갖춰간다. 잘만 키우면 외양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겠다. 이 소를 내다팔면 우리 집도 큰 부자가 되리라. 아니지. 송아지 두 마리만 낳아주는 날엔 떼부자는 떼 놓은 당상인데 뭐 하러 팔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꼴청을 정리하고 풀을 썰려고 하자 돼지우리에 있던 동무가 더 시끄럽다. 저에게도 먹을 걸 달라고 꽥꽥거리며 뛰쳐나올 기세다. 고무 양동이에 구정물 휘저어 한 통 갖다 주니 잠잠해졌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발갛게 걸릴 무렵 나는 더 마음이 바쁘다. 베어 온 풀을 썰어 두고 불 때서 쇠죽을 쑤고 물을 길어 오면 어둑어둑해진다. 쇠죽을 다 먹는 동안 늘 부삭(아궁이) 바닥에 앉아 지켜보았던 소년 시절 내겐 소는 웬만한 동무 못지않았다. 그냥 가족의 일원이었다. 식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를 각별한 사이였다.

지난 여름부터 늦가을까지는 꼴을 베어 소죽을 쒀주니 작두질이 쉬웠다. 풀만 썰면 한 손으로 먹이고 다른 한 손으로 눌러주면 "푹푹" 소리를 내며 잘도 썰렸다. 우북이 쌓인 꼴을 차츰 당겨와 왼손으로 한 깍지를 만들어 먹이는 게 시간이 걸릴 뿐 누르는 힘은 거의 들지 않았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인 나도 쉽게 할 수 있었으니 일이 바쁠 때는 당연히 내 몫이 되었고 몇 번 해보자 형과 아버지가 없어도 척척 알아서 해낼 만큼 손에 익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지게 1단을 떼었으니 물 양동이 가져다 나르는 것 빼고는 식은 죽 먹기였다.

맛있는 풀만 골라 꼴을 베어 가보 1호가 배고플까 한시름도 늦추지 않고 꼴을 한 삼태기 구시(구유의 사투리)에 넣어주면 콧바람을 "푹푹" 불며 긴 혀를 자유자재로 놀려 휘휘 감는다. 금세 날름거리며 쏙쏙 빨아들여 1차 먹이를 싹싹 먹어치운다.

큰 눈동자를 굴리며 더 달라고 애원하면 한 바가지 더 퍼서 줘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여러 번 씹지 않고 밀어 넣기만 하는 초식동물 밥을 대기가 어찌 쉬웠겠는가마는 그 재미마저 없었더라면 내 어린시절 꿈은 토실토실 영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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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겁던 작두는 늘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인제산림문화박물관 소장품 촬영 ⓒ 김규환

일단 추수를 마치고나면 소에게도 달갑지 않은 시절이다. 제철에 나는 풀을 종류별로 다 먹어본 소는 딱딱한 지푸라기 여물로 쑨 쇠죽을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먹어야 하는 지겨운 시기다. 만일 몽근 쌀겨와 달달한 호박쪼가리, 말려둔 풀이 없다면 입맛을 앗아가 바닥을 싹싹 말끔히 쓸어먹지 않고 꼭 남겨 놓으니 아버지께 꾸중 깨나 듣곤 했다. 처량한 신세다.

겨울에서 초봄까지 새 풀이 나기 전까지는 작두가 잘 들면 모를까 어른도 혼자서는 한 줌 꼭 뭉친 지푸라기를 썰기는 쉽지 않았다. 날이 휘고 가볍게 혼자 썰도록 개량한 강철 작두가 들어오기까지 무쇠 작두는 짚이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힘에 부쳐 한 다발을 썰고 나면 어깨가 아려왔다. 보통 공력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대개 볏짚을 썰려면 2인 1조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른들도 남편은 짚 다발을 풀어 꽁꽁 뭉쳐 한 치(寸, 3.03cm)에서 한 치 반 크기로 일정하게 먹여주면 작두 손잡이 부분에 달린 끈을 잡은 아내가 나무토막 발판을 힘껏 올려 쉬지 않고 탄력을 주어 밟아줘야만 소 한 마리라도 기를 수 있었다. 남정네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소를 기르기는 쉽지 않았다. 아들을 많이 낳으려고 했던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두 살 터울인 형과 수도 없이 다투기도 했지만 여물 썰 때만큼은 언제나 한 조가 되었다. 다리 힘이 달려도 둘이서 하는 위험한 일에 깍지를 얼른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있어야 하고, 손아귀 힘으로 꼭 쥐어줘야 잘 썰리며, 임기응변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 대개는 형이 작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두껍게 두 줄로 엮어 맨 새끼줄을 홀쳐 매듭을 만든 끝을 단단히 잡았다. 왼발을 버팀목에 디디고 왼손엔 작대기를 하나 잡고 작두날을 하늘 끝까지 올려 최대한 아가리를 벌렸다가 잽싸게 단번에 발판을 밟아 두 손을 감싼 분량의 짚을 누른다. 덜커덩거리는 작두날과 고두쇠가 이리저리 움직일 뿐 덩치 큰 작두는 꿈쩍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북!"
"북!"

안쪽으로 잘린 여물이 쌓인다. 새로 짚을 뭉치는 동안 작두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형은 안쪽으로 쭉쭉 밀어 넣는다. 벌써 세 다발 째다.

해질녘까지 이어진 작업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한없이 여물만 썰다가는 곧 캄캄한 밤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물을 솥바닥에서 조금 높게 앉히고 구정물통을 휘휘 저어 구정물을 붓고 군불을 메웠다. 밥 알갱이와 김치쪼가리가 푸석푸석한 여물을 지그시 눌러준다. 곰부랏대(갈고리 모양의 나무로 내용물을 뒤집거나 퍼 담을 때 쓰는 도구)로 휘휘 둘러 한바퀴 저어주고 뚜껑을 닫았다.

소죽솥에 쓰는 나무는 잘 마르지 않아 매캐한 연기를 맘껏 내뿜었다. 솔가지를 더 밀어 넣자 처음엔 푸른 연기가 아래채를 감쌌고 이내 불이 붙어 고래가 터졌는지 시커먼 연기로 바뀌었다가 활활 타오르고 장작을 조심조심 올리자 이내 불이 붙어 손이 가지 않아도 잘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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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 동무였던 아름다운 소 한마리. 순천 낙안읍성에서 ⓒ 김규환

베틀을 달가닥거리며 아침부터 삼을 삼던 어머니도 그 무렵 나오셔서 잘 마른 나무를 꺾어 밥을 짓고 누나는 물을 길러 갔다.

여물 감을 먹여주는 사람은 눈이 펄펄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도 장갑을 낄 수도 없는 처지다. 장갑을 끼고 작두에 짚을 먹였다가는 지푸라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 언제 손가락이 잘릴 지도 모른다.

손이 곱아도 도리 없이 입김으로 호호 불거나 내가 쉬는 틈에 잠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온기를 조금이라도 불어넣기도 하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잠깐 멈추고 소죽솥을 감싸 손을 녹였다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눈이 녹는 오후 서너 시쯤에 처마자락에서 여물을 썰다보면 뒷덜미에 짚시랑물이 흘러 옷을 죄다 적시는 일도 잦았다. 찬바람이 더 세지고 처마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면 내일 하루는 어떻게든 건너뛰어 볼 요량으로 욕심을 내보지만 맘같이 될지는 미지수다.

넣어준 짚이 썰리면 다시 쳐들었다가 먹잇감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것도 일순간이다. 가끔 짚이 날이 빠진 곳에서 씹히면 재차 그 자리를 썰 뿐 한 팔 길이가 넘는 예전 기다란 볏짚을 열다섯 차례 가량 밟아주면 꽁무니만 남는다. 꽁무니를 새로운 깍지에 합치고 썰기를 반복하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위에 있기가 지겨워 아래서 짚을 먹여볼라치면 다친다고 만류하곤 했는데 그건 수년 전 작은형이 당한 사건 때문에 나에겐 절대 먹이는 걸 시키지 말라며 어른들이 신신당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큰형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두 형제가 작두로 여물을 썰고 있었다. 한참 썰다가 짚 다발이 떨어지자 외양간 위에 있던 짚을 가지러 올라간 큰형이 내려왔을 때는 둘째형이 자신이 해보겠다며 덤비더라는 거다. 하는 수 없이 동생이 먹이고 형이 발로 밟는 형국이 되었다.

몇 번 썰어나가다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내 손꾸락!"

이미 낌새를 알아차린 큰형은 황급히 하던 일을 멈추고 밑으로 내려왔다.

"어딨냐? 손가락이 없다구?"
"잉. 검지손꾸락이 한나 없어졌당께."
"참말로 큰일났구만. 어쩐다냐? 어떻게혀. 인자 우린 아부지한테 죽었구만…. 긍께 성이 하지 말라고 할 때 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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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죽바가지에 쇠죽을 몇 바가지 퍼서 주면 맛나게 잘 먹던 소는 어디에 있는가. 갈고리 모양의 소죽 푸던 도구를 '곰부랏대'라고 했습니다. 인제산림문화박물관에서 ⓒ 김규환

여물청 가까이에서 서성이던 닭들이 몰려와 썰어놓은 여물과 짚다발 주위를 후벼 파고 마구 휘저어 나락을 주워 먹느라 정신이 없다. 혼이 나간 두 형제는 주위를 살펴보지만 쉬 찾을 길이 없었다. 썰다만 지푸라기 아래와 여물 속을 뒤져보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닭을 휙 발로 차며 쫒아버리자 이젠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두엄자리로 몰려간다. 찾다 찾다 못 찾을 걸로 알고 작파할 심정이었는데 닭이 뭔가를 발견한 듯 "꼭꼬꼬꼬" 잔뜩 긴장하여 서있다. 몇 마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신기한 듯 조롱한다. 그걸 멋모르고 물고 가는 날엔 끝장이다. 다급해진 형제는 닭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성, 여그!"
"아부지!"
"아부지!"

형제가 여물 썰던 자리 주위를 살피고 있는 사이 어느새 폴짝폴짝 살아 있던 손가락이 톡톡톡 튀어 7~8미터나 되는 마당 한가운데까지 뛰어갔던 모양이다.

"아부지!"

재차 아버지를 부르자 부리나케 큰방에서 일하다가 밖으로 나오셨다.

"잡았다. 거시가 카만 있어봐봐."
"엉엉엉."

"왜 그냐?"
"아부지, 손꾸락을 짤라부렀어라우."
"어딨어?"
"여그요."

"큰아야! 코 좀 풀어봐라. 많이 풀어놔."
"예."

"핑~ 핑~"

없던 코까지 짜서 푼 사이 아버지는 둘째 형을 안심시켰다. 질질 흐르는 누런 코를 손가락 잘린 부위에 칠하고 떨어져 나간 토막을 붙들고 있다가 붙였다. 아버지는 담뱃가루를 풀어 겉에 발랐다. 걸레로 쓰려고 남겨둔 러닝셔츠를 잘라 동여매고 열흘 남짓 지나자 아무 일 없었던 듯 곧바로 붙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둘째형은 아무 일 없이 군대를 무사히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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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죽 쑤던 아래채 아궁이와 솥단지 ⓒ 김규환

집집마다 아이들은 여름엔 꼴 베기 싫으면 상처를 내오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일로서 노동으로서 했으니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겨울엔 나무 하다가 낫으로 발목이나 손을 크게 다쳐오는 일도 잦았다. 간혹 누구누구 아이들은 손목이 잘렸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나 어려운 시절 고생했던 70년대 청소년들은 하마터면 손가락 없이 평생 살아야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 그 어느 곳에 그처럼 여물 썰고 쇠죽 쒀주는 집 남아있을까? 구수한 쇠죽냄새가 그리운 계절이다. 허전한 마음 데워줄 아랫목에 등짝 지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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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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