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작두 아가리를 벌리고 여물을 썰던 70년대 고향. 이 장면은 친구들끼리 퇴비 증산을 위해 풋나무를 썰던 모습입니다.신안군
봄에 형들이 보낸 돈으로 드디어 우리 소를 샀으니 어느 해보다 정성껏 길렀다. 아버지 몰래 퍼다 준 쌀겨 사료 때문인지 가을엔 송치를 벗어나 먹는 양도 무척이나 늘었다. 꼴로만 배를 다 채워줄 수 없어 콩깍지, 고마리와 갈대 등 거친 풀을 닥치는 대로 먹여도 되지만 나는 잘고 맛있는 바랭이 씨앗이 맺힌 고운 풀을 골라 베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송아지는 꼬리로 쇠파리를 쫓으며 나를 반긴다. 되새김질을 쉬지 않고 하는데 옆에서 본 우리 집 소는 배가 훌쭉 꺼져 있었다.
"쇠양치(송치 또는 송아지의 사투리)야 쫌만 지달려. 이 성아가 소깨잘(과자처럼 생긴 풀과 나무의 중간인 붉은 줄기의 소꼴)을 썰어줄텡께. 알겠제?"
발을 굴리며 응대를 한다. 함께 산 지 여섯 달을 훌쩍 넘긴 때라 내 말을 거의 알아듣는다.
하루하루 어깨가 탁 벌어져 반반하고 허리가 매끈하게 쭉 빠진 몸매를 갖춰간다. 잘만 키우면 외양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겠다. 이 소를 내다팔면 우리 집도 큰 부자가 되리라. 아니지. 송아지 두 마리만 낳아주는 날엔 떼부자는 떼 놓은 당상인데 뭐 하러 팔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꼴청을 정리하고 풀을 썰려고 하자 돼지우리에 있던 동무가 더 시끄럽다. 저에게도 먹을 걸 달라고 꽥꽥거리며 뛰쳐나올 기세다. 고무 양동이에 구정물 휘저어 한 통 갖다 주니 잠잠해졌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발갛게 걸릴 무렵 나는 더 마음이 바쁘다. 베어 온 풀을 썰어 두고 불 때서 쇠죽을 쑤고 물을 길어 오면 어둑어둑해진다. 쇠죽을 다 먹는 동안 늘 부삭(아궁이) 바닥에 앉아 지켜보았던 소년 시절 내겐 소는 웬만한 동무 못지않았다. 그냥 가족의 일원이었다. 식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를 각별한 사이였다.
지난 여름부터 늦가을까지는 꼴을 베어 소죽을 쒀주니 작두질이 쉬웠다. 풀만 썰면 한 손으로 먹이고 다른 한 손으로 눌러주면 "푹푹" 소리를 내며 잘도 썰렸다. 우북이 쌓인 꼴을 차츰 당겨와 왼손으로 한 깍지를 만들어 먹이는 게 시간이 걸릴 뿐 누르는 힘은 거의 들지 않았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인 나도 쉽게 할 수 있었으니 일이 바쁠 때는 당연히 내 몫이 되었고 몇 번 해보자 형과 아버지가 없어도 척척 알아서 해낼 만큼 손에 익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지게 1단을 떼었으니 물 양동이 가져다 나르는 것 빼고는 식은 죽 먹기였다.
맛있는 풀만 골라 꼴을 베어 가보 1호가 배고플까 한시름도 늦추지 않고 꼴을 한 삼태기 구시(구유의 사투리)에 넣어주면 콧바람을 "푹푹" 불며 긴 혀를 자유자재로 놀려 휘휘 감는다. 금세 날름거리며 쏙쏙 빨아들여 1차 먹이를 싹싹 먹어치운다.
큰 눈동자를 굴리며 더 달라고 애원하면 한 바가지 더 퍼서 줘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여러 번 씹지 않고 밀어 넣기만 하는 초식동물 밥을 대기가 어찌 쉬웠겠는가마는 그 재미마저 없었더라면 내 어린시절 꿈은 토실토실 영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