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의 연날리기

낙안읍성 예비 초등생 정호의 겨울이야기

등록 2005.02.06 19:17수정 2005.02.0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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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엔 매년 취학아동이 없어 폐교가 되는 학교가 많다. 모두들 도시로 나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만의 공간으로 변했기 때문. 낙안도 농촌에 속하지만 그에 비하면 아직 아이들의 숫자가 많은 편이다.


a 동네아이들과 함께 연을 날리고 있는 정호

동네아이들과 함께 연을 날리고 있는 정호 ⓒ 서정일

이정호(8), 초등학생이 되기 위해 예비소집을 앞두고 있는 낙안읍성내에 살고 있는 씩씩한 사내아이, 그동안 정호에게 있어 성곽으로 둘러싸인 4만여평이나 되는 놀이터(?)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풍요로운 마당이었다. 하지만 곧 있으면 누리던 자유를 조금이나마 구속받게 된다. 초등학생이 되기 때문이다.

엊그제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 방안에 꼼짝않고 있던 정호, 오늘은 또래 애들과 어울려 연날리기에 한창이다. 겨울에 할 수 있는 놀이 중의 으뜸은 역시 연날리기. 먼저 나와서 연실을 당기고 있는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해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연을 바라본다.

a 정호가 연실을 잡고 날리자 마자 연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정호가 연실을 잡고 날리자 마자 연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 서정일

"한번 날려볼래?"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네 누나가 정호에게 연실을 넘겨준다. 신이 난 정호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연이 가자는 대로 달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친다 "저 위에 올라가면 연이 더 높이 날아" 그리고 쏜살같이 성곽 위로 올라간다. 아마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연을 날리면 연도 더 높이 올라갈 거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오르자마자 연은 이내 나무가지에 걸리고 만다. 병아리 운전이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동네 누나는 성곽 위에까지 쫓아와서 '왜 성곽 나무 근처에서 연을 날렸냐'고 하면서 화를 낸다. 정호는 미안함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서 있다.

a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 서정일

아이들은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내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호는 미안한 마음에 연실부터 당겨본다. 조금전까지 버럭 소리를 지르던 동네 누나도 말없이 옆에 서서 돕는다. 그러나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는 연, 아마도 연실이 엉켜서 나뭇가지에 단단히 걸렸나 보다.


한참을 그렇게 연실을 가지고 씨름하던 동네아이들, 손살같이 뛰어가 대나무를 구해온다. 이번에도 정호가 해 보겠다고 또 나선다. 한살이라도 많은 동네형이 했으면 좀 더 수월했을텐데 기어이 우기는 정호,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a 대나무로 연을 내려보려고 하는 정호

대나무로 연을 내려보려고 하는 정호 ⓒ 서정일

그러나 설상가상 휘저은 대나무에 연 꼬리가 잘리고 연은 나동그라진다. 고치지 않으면 도무지 날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정호의 마음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지금껏 입을 삐죽거리며 타박을 하던 동네누나가 왠일인지 괜찮다면서 사태를 정리해 버린다. 일순간 아이들의 표정은 다시 밝아진다.


아이들이 화내는 것 그리고 용서하는 모습은 참으로 재미있다.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해칠 생각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용서도 아니다. 그저 투정처럼 화를 내고 아무 거래없이 용서해 준다. 가끔은 인심쓰듯 이렇게 내뱉는다 '그래 용서해 줄께' 그들만이 간직한 참으로 순수한 마음이다.

a 표정이 밝아진 아이들은 또 다른 놀이를 구상했다

표정이 밝아진 아이들은 또 다른 놀이를 구상했다 ⓒ 서정일

표정이 일순간 환해진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의 일들을 금세 잊어버린다. 고장난 연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지만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른 놀이를 구상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때 아이들의 눈에 띈 것은 성안에 있는 자그마한 연못인 연지. 요 며칠 추위에 연못가로 얼음이 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달리기 시작한다.

a 새로운 놀이를 찾아 힘차게 뛰어가는 아이들

새로운 놀이를 찾아 힘차게 뛰어가는 아이들 ⓒ 서정일

누가 누구와 싸웠고 누가 누구를 용서했는지도 잊어버리고 한무더기가 되어 신나게 달려간다. 예비초등생 정호의 연날리기는 이렇게 실패로 끝이났지만 잠깐 동안 있었던 '그들만의 사회생활'에서 서로들 많이 배웠을 거라 생각된다. 내일 모레면 민족의 명절 설이다. 우리 사회도 초보에게 기회를 주고 정이 있는 나무람으로 그리고 아낌없이 용서하는 아이들의 사회처럼 아름다운 을유년이 되길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다큐남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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