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 입석표로 서울까지 앉아 와 봤소?

[설 특집 7]자리 주인이 “여기요….” 할까봐 조마조마...광주역에서 서울역까지

등록 2005.02.10 13:19수정 2005.02.1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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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고속터미널에는 중앙고속, 천일고속, 삼화고속, 동양고속은 거의 없었다. 광주공용터미널에서 10여 분 걷다보면 외지로 나가는 터미널이 나오는데 90% 이상이 거북이가 그려진 광주고속(지금의 금호고속)이었다.

광주나 전남 사람들은 지역을 벗어날 때는 고속버스를 타야하고 이왕 탈 것이라면 으레 광주고속을 타야 하는 걸로 알았다. 그건 기차가 단선이라 많지 않기도 했지만 광주고속은 해태 다음으로 지역민들에게 둘도 없는 기업이었고 서울까지 가는 시간도 가장 빨랐던 운송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광주고속! 휴가철, 붐비는 주말, 명절 때도 10분 기다릴 필요 없이 30초, 아니 10초마다 한대씩을 배정해주니 이용자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고마운가. 굳이 정규 시간에 맞춰 표를 끊거나 예매를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 표나 발급받고 그냥 서서 기회를 엿보다 올라타면 되니 누가 헛수고를 사서 하겠는가.

사업체 규모도 컸지만 다른 표를 사가지고 오면 다시 바꿔 오는 사례도 흔했다. 더군다나 전국 어느 도시든 오가지 않는 노선이 없었다. 이토록 그 지역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사실을 금호고속(주)은 알고나 있을까. 광주고속에서 금호고속으로 브랜드 이름을 고쳤을 때 허탈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니들이 키워준 고향을 떠난다 이 말이지?”라고 생각한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섭섭하기 짝이 없었지만 향토기업이 웅비를 꿈꾼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소위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기를 바랐는데 그게 아시아나항공이었다. 대한항공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항공업계의 2인자로서 발돋움한다는 것 자체가 꿈과 같은 현실로 다가오니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하며 기뻐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81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가 되었다. 정서상 “껌이라면 역시 롯데 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역의 피를 빨아먹고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로야구 탓에 해태 상표가 아니면 손에 대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볼모로 무럭무럭 커갔다.

‘해태’라는 간판은 광주와 전남권 상점 간판을 휩쓸었고 껌 하나, 음료수 하나도 해태라야만 사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IMF 때 외국기업에 팔려나가고 해태타이거즈 구단이 휘청거릴 때 비로소 그 진절머리 나는 올가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태 껌 하나 아무거나 사서 차에 올라 질근질근 씹어댔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호남 사람이었다. 반면 부산에 가면 롯데 상표 외엔 구입하지 않는 반대급부가 사람 마음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결과 선거 때마다 게임이 되지 않는 결과로 직결되는 한국 정치의 단면이자 비극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고속버스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서대전역에서 갈라져 익산 이리역까지 와서 목포가 종착인 호남선과 전주를 거쳐 여수까지 가는 전라선으로 갈려서 지나다니는 기차 배차 간격이 한 시간에 한두 대 꼴이라 기차표를 사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고 평소에도 기차 오는 시간을 기다리느니 버스로 30~40분 일찍 출발하는 게 서울이나 대도시로 일찍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광주역이나 남광주역엔 파리만 날렸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함이다.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는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등 상위 등급 열차가 지나치는 걸 맞추느라 객차 안에서 최장 20~30분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 빼고는 주말이나 명절에는 예정시각에 가깝게 도착하니 서울역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워가며 열차표를 예매하려고 야단이었다.

호남사람들 귀성행렬은 고난이었다. 죄다 수도권으로 이농을 한 탓에 왕복 2차선 호남고속도로에 차를 들이대는 순간 교통지옥 아비규환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서울에서 광주 아래까지 18, 19, 20시간은 기본이요, 25시간까지 잡아먹는 환장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무에 그리 고향이 좋다고 그 생고생을 해가며 내려가는지 모른다.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지에서 기차표 하나는 집안 간에도 감춰두거나 줄을 대서 몰래 받아야 했으니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음이다.

이제 그 처절한 귀경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운의 열쇠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보따리를 풀 차례다. 1988년 설을 쇠고 여유를 부리며 집에 있었다. 중기라는 둘도 없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규환아, 내가 서울 가는 입석표 한 장 있으니까 같이 갈래?”

머뭇거렸더니,

“기차가 싫으면 고속버스 타고 오던가.”

“잠깐만. 내가 다시 전화할게.”

“하여튼 얼른 결정해야 한다. 다른 애들 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그 먼 길을 통일호로 가면 6시간이 넘게 걸린다. 완행 비둘기호로 광주까지 12시간 걸려서 내려가느라 이골이 난 경험이 있던 지라 머뭇거리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도 친한 친구와 같이 이야기 하며 삶은 달걀과 귤을 안주삼아 술 한 잔 나누고 차량 연결지점에서 담배도 한대씩 필 수 있으니 함께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일반 차편이나 관광버스를 이용하면 최소 서울 가는 시간도 12시간 이상 잡아야 하지만 예닐곱 시간이면 어김없이 도착하니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이토록 결정이 신중해야 했던 게 당시 귀성, 귀경의 기본이었다.

기차를 기다리느라 저녁밥 먹으면서 반주까지 곁들여 거나해진 우리는 밤 9시를 넘긴 시각 드디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실로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였다. 색다른 기분에 취할 여유도 없이 72개 좌석 중 60번대 후반 자리에 무턱대고 둘이서 앉았다. 송정리나 장성까지만 앉아서 가도 어디인가.

재수가 옴 붙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인데 “푹푹” “푹차 푹차” 경적을 울리더니 허름한 광주를 빠져나가 영산강을 건너더니 골짜기에 접어든다. 사람들이 타기만 할뿐 내리지는 않는다. 백양사역을 거쳐 정읍을 지나고 김제까지는 그래도 한산한 편이다. 그 때까지 우린 누가 대뜸 다가와서는 “저기요….” 할까봐 마음을 꽤나 졸였다.

칠흑을 뚫고 은하철도999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열차는 첫 관문인 이리역에 도착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만나는 도시라 꽤 많은 사람들이 탔다. 이제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줘야 할 확률이 거의 100%에 육박하는 아쉬운 시간이다. 우리 자리가 아니었는데도 내주기 아깝다.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제자리를 찾아 나선다. 우린 벌써 엉덩이를 들썩여 원래 주인을 찾아줄 생각을 미리 했다. 기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져 빠져나간 사이 바리바리 싼 꾸러미를 선반에 올리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미처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몇몇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우리 쪽으론 오지 않았다.

우린 나지막한 소리로 키득거리며 이번도 무사통과 한 걸 자축하고 있었다.

“야, 웃지 마.”
“왜 인마. 이런 횡재가 어딨냐?”
“강경은 역이 작으니까 서대전까지는 갈 수 있겠지?”
“그래도 천안에서는 별 수 없을 거야.”
“하여튼 걱정 말고 술이나 한잔 더하자. 이번에 지나가면 맥주나 한 병 더 사라.”


무슨 영문이었을까. 서대전을 지나도 우리 자리는 온전히 보존되었다. 엉덩이뼈가 아프도록 앉아서만 갔다. 이제 천안만 안전하게 통과하면 수원까지 직행을 하게 된다. 마지막 두 코스는 사람들이 타지 않으니 서울역에서 “만세!”를 불러도 좋으리라.

정말 이런 행운이 있을까. 새벽 4시 40분 쯤 친구와 나는 명절에 광주에서 서울까지 입석표로 줄곧 앉아서 오는 대단한 경험을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표를 끊었을 것이고, 누구든 표를 물렸다면 재차 발매가 되었을 것인데 누구 하나 와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지를 않은 것이다.

소소하지만 이런 행운이 다시 찾아오면 그 힘으로 힘차게 살아보리라.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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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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