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앞까지 나를 실어 나른 자전거

눈 펄펄 내리던 날, 여자친구 만나러 20리가 넘는 길을 달리다

등록 2005.02.13 21:54수정 2005.02.1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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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자전거는 아니지만 눈 쌓인 자전거를 털어 집을 나섰다. 어찌나 자꾸 체인이 벗겨지는지 중간에 버렸으면 더 좋았을뻔 했는데 기어이 끌고 갔다. ⓒ 김규환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생전 처음 물도 데우지 않고 다섯 살 아래 동생과 마른 빨랫감과 방망이만 들고 냇가로 나갔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빨랫감을 냇가 찬물에 담갔다 꺼내서 몇 번을 주무르다가 비누를 칠해 방망이질을 했다. 비누도 찬물에서는 풀어지지 않아 거의 칠해지지도 않았다. 마구 두들기면 땟물이 빠지는 줄 알고 힘껏 두들겼다.

"탁탁 턱턱 턱턱턱 푹푹푹!"

얼굴에 비눗물이 툭툭 튀었지만 우린 그렇게 밖에 빨래를 할 줄 몰랐다. 마침 마을 공동우물에서 가장 가까이 사시는 강원도 할머니께서 나와 "에고, 이 불쌍한 것들" 혀를 끌끌 차시며 "야, 이리들 내놔. 니기들이 뭔 빨래를 한다고…. 몹쓸 놈의 인간 이 철부지들은 놔두고 지가 먼저 눈 감고 뒤져?"라고 말씀하시니 더 처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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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할머니에게 빨랫감을 빼앗기고 멀뚱멀뚱 쳐다보며 덜덜덜 떨고만 있었다. 집안 할머니는 댁으로 들어가셔서 끓는 물을 한 양동이 퍼 와서는 거지꼴이 된 우리 옷에서 나오는 까만 때 국물을 뽑아가며 빨래를 마쳤다.

끙끙 대며 집으로 들고 와서 빨랫줄에 널어놓으니 1시간도 안 되어 물이 빠지다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빨래 걷는 것도 잊고 밖에 두고 밥을 해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본 빨래는 동태보다 더 꽁꽁 얼어 뻣뻣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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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 마을 어귀 소나무가 흔들리며 세차게 바람이 불어 눈보라가 쳤다. ⓒ 김규환

밥 해 먹는 것도 간단치가 않았고 맛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가마솥에 미리 물을 데워 설거지물을 확보해 놓으니 부엌과 먹는 것 하나도 온화하고 따뜻하기만 했지만 집안에 한 사람이 없으니 전기밥통에 밥을 해놓으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냄새가 풀풀 나고 꼬들꼬들 말라 비틀어졌다.

방안엔 찬 기운이 감돌았고 국 하나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중학교 2학년이던 나와 초등학교 4학년 여동생이 하는 밥엔 눈물이 들어가 있었다. 끈기가 없는 밥을 간도 맞지 않는 국에 말아서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떠먹고 김치쪼가리에 도시락을 싸서 매번 똑같은 점심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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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까지 내려가는 길은 예전과 별 변화가 없다. ⓒ 김규환

이러니 한창 사춘기였던 나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낮술을 더 찾으셨던 아버지는 온종일 술에 취해있으니 그 상황을 잠시라도 보지 않으려면 밖으로 나돌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 집을 떠나자. 잠시라도 집을 빠져 나가있으면 이런 꼬라지는 보지 않을 거야. 함께 힘을 합쳐도 살아가기 팍팍한데 집이 이 모양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도 없어.'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돌았다. 그냥 순한 양이었고 시키지 않아도 살림살이에 단단히 한몫했던 나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그때부터 독버섯처럼 싹터 삭으러들 줄 몰랐다. 집안 꼴이 어찌되든 내겐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잘 곳은 마땅치 않으니 그냥 집에 와서 눈만 붙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방황하던 나에게 우리집에 와서 살림을 해주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어떤 여학생은 내게 위안이 되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몇몇은 그냥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었으니 같은 시기에 나를 좋아한다는 아이 세 명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 둘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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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엔 이렇게 아름다운 눈이 소복이 쌓였다. ⓒ 김규환

다섯 아이 중 유독 내게 힘이 되었던 친구는 해림이다. 말괄량이 해림이는 키가 나보다 훨씬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생각했으나 그 아이가 힘들 때는 내가 있었고 내가 힘들 때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남달랐던 우정은 아직도 서로에게 힘이다.

내 마음에는 늘 해림이가 있었다. 낮에 학교에서 봤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토요일이 되면 우리 집과는 정반대인 그 아이가 넘어가는 재를 따라 눈싸움을 하며 여럿이서 함께 걷기도 했다. 일요일엔 더 참을 수 없었다. 방학을 하여 눈이 펄펄 내리던 날엔 그리워 집을 박차고 나갔다.

그 집 앞을 가기 위해 나는 자전거를 배웠는지 모른다. 그 집 앞에는 담뱃가게가 있다. 스카이민트 껌과 전매청 담배 광고문구가 또렷하다. 화순군 북면 서유리. 그 작은 구멍가게를 찾아 나는 눈 오던 날 구닥다리 자전거를 반은 끌고 반을 타고서 달렸다.

집엔 온기라곤 오간데 없으니 내 마음 붙일 곳은 유일하게 그 담뱃가게에 사는 여자친구네였다. 그 아이가 내가 저를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일분일초라도 보려고 눈보라를 뚫고 첫사랑 찾아 떠나는 내 마음은 쿵쾅쿵쾅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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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자작자작 흐르던 냇가엔 작은 섬이 만들어졌다. ⓒ 김규환

20리 길이 넘는 9km나 떨어져 있는 해림이를 보러 가는 길 따라 졸졸 흘러가는 천변은 얼음이 얼지 않았더라면 종이배라도 띄워 내 마음을 전하려하면 거치적거릴 것이 없지만 꽁꽁 얼어 있다. 내 구닥다리 자전거를 끌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 네 시 반쯤 마을에서 출발할 때는 좁은 도로라 차 바퀴 하나 나지 않아 핸들만 잘 잡고 페달을 밟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간다. 내리막길뿐인 길이 너무나 고맙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귓전이 떨어져나갈 듯 매서운 추위에 손마저 곱아왔지만 소녀를 보러 가는 내 마음이 더 뜨거워 묵묵히 녹이고 있었다.

절반을 조금 지나서는 경사는 완만해진다. 이제는 발판을 굴려 힘을 얻어야 원리-남치-담양 갈전-맹리를 거쳐 서유리까지 허허벌판을 지나야 한다. 달가닥거리는 자전거지만 소리쯤이야 별 문제가 아니다. 이젠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비포장 도로여도 버스가 다니는 넓은 길이어서 잠깐 방심했다가는 언제 눈 위에 미끄러져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

잔뜩 긴장하여 구불구불 좌우로 흔들리며 가고 있는데 그리스(윤활유) 하나 칠하지 않은 체인이 툭 벗겨지고 말았다. 급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여 자전거에서 내려 체인 줄을 입힌다. 한 겨울 이 무슨 궁상이람?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이런 생고생은 사서 하지 않아도 되는데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길바닥 위에서 자전거를 고치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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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살았던 서유와 중기, 인선이 사촌 형제가 살았던 동유마을 사이에 도착하기 전에 어두컴컴해졌다. ⓒ 김규환

굴러다니는 가느다란 나무 막대를 주워 끼웠다. 목장갑 하나로는 견디기 힘들도록 손이 시려웠다. 아니 여자친구 만나러 간다며 멋 부리고 나선 까닭에 노출된 얼굴은 얼얼하여 앞을 똑바로 쳐다보기 조차 힘들었다.

끊임없이 눈발이 날려 눈을 가로 막았다. 그래도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조금 속도를 내려고 힘주어 밟으면 100미터를 가지 못하고 또 체인이 벗겨지고 마니 이거 환장할 노릇이다. 10리길 평 길을 가는데 대략 여덟 번을 내려 고치고 나니 환하던 날이 이내 어두컴컴해졌다.

마지막엔 체인 끼우는 걸 포기하고 자전거를 끌고 내달렸다. 이도 수월치 않았다. 반들반들 차가 지나간 숨겨진 바퀴자국 아래를 헛디디면 자전거와 함께 쭉 미끄러져 눈밭에 넘어졌다. 그 시각 거의 다 와 가는데 도로 집으로 방향을 돌릴 수도 없거니와 그런 맘을 먹는다면 되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집을 나설 때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쪽지 하나 남기고 온 나였다. 어떻게든 친구 중기와 인선이 두 집 중 밥 먹을 시간을 넘기면 밤새 쫄쫄 배를 곯아야 할지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해림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다급해졌다. 양쪽 마을을 허비한 거리까지 환산하면 2십 5리를 넘는 거리를 쏘다닌 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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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 김규환

손전화도 없던 때라 나는 곧장 그 가게로 가지 않았다. 2구 동유리에 사는 남자 친구 집으로 먼저 갔다. 삼총사 중 맏이였던 내가 중기와 인선이를 대동하고 대신 불러달라면 내 마음 들키지 않게 되어 더 안심이다.

“야 얼른 불러봐.”
“나올까?”
“야색꺄 일단 불러보라니까.”
“해림아! 해림아!”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아이만 들릴 뿐 노인들 귀에 들릴 듯 말 듯 모기 같은 소리다.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이번엔 인선이 니가 더 크게 불러봐.”
“해림아~”

문을 빼곰히 열고 나타난다.

“야 왜 왔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으려고 내가 그 먼 길을 달려왔더란 말인가. 두 아이는 멀찌감치 멀어져 갔다.

“그냥.”
“야, 추운데 어떻게 갈려고?”
“걱정 마.”
“밥은?”
“밥이사 묵으면 되제. 그건 그렇고 뭣허냐?”
“공부하고 있었지.”
“열심히 해라.”
“그래. 좋은 고등학교 가서 성공하려면 우린 노력을 많이 해야 돼. 널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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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할 때 이렇게 아름다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 김규환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이와 싱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보고 싶었다고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지난 번처럼 곧 들어갈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 들어가 봐야 돼. 학교에서 보자.”
“잘 자.”

맥 빠진 기분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아이들은 대뜸 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묻는다.

“규환아 뭔 말 했냐?”
“해림이랑 만나니까 좋디?”
“해림이가 뭐라 그래?”

말수가 적지 않았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쌀쌀맞게 대했던 아이가 현명했다. 나이는 한 살 아래였던 그 아이는 누나처럼 이성을 잃지 않았다. 섭섭했지만 얼굴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막힌 수챗구멍이 확 뚫리듯 편안했다.

중기네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자전거는 그대로 둔 채 친구들과 다음날 학교로 갔다. 며칠 동안 잊고 지내던 자전거를 끌고 오라는 내 말에 친구들 답변은 “야 그거 고쳐봐야 안 된다더라. 고물상 아저씨한테 넘겨버렸데” 한 마디였다.

사오던 날 망가지고 등하교 때 나를 죽일 뻔 했고 사춘기 나를 여자친구네 앞까지 실어 날랐던 자전거와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노래방에 가면 신촌부르스가 부르는 <골목길>을 종종 부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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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에서 바라본 시리도록 찬란한 백아산의 눈 ⓒ 김규환

골목길

골목길 접어 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수준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올 것만 같아
마음을 졸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만나면 아무 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가면서 후회를 하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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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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