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걸군, 그 시절 자네는 문학청년이었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80] '대통령의 아들' 제자에게

등록 2005.02.14 03:37수정 2005.02.15 11:11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2002년 구속 당시 굳게 입을 다문 김홍걸씨의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홍걸군, 참 오랜만일세. 내 기억으로는 10여년 전 교통사고로 운명한 자네 동창 남성우군 빈소에서 자네를 만난 이후 처음 같네. 사실은 자네를 한번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만 매번 때를 놓치고 말았네.

자네 아버님이 현직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내가 만나자고 하면 무슨 이권 청탁의 오해도 받을 것 같아서 주저하다가 끝내 단념했네. 그 후 자네가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는 나를 만날 경황도 없었겠지만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처럼 가만히 있는 게 도와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불난 집에 부채질로 오인 받을 것 같아서 참았네.

어려운 시기를 잘 감내했던 과묵한 학생

나는 자네를 떠올리면 언제나 수업 시간에 말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과 1980년 여름 설악산으로 간 수학여행의 세계민속제 때, 자네가 인도 여인으로 분장했던 그 요염한 모습이 생각나네. 그때 그 인도 여인은 젖가슴도 엄청 풍만했고 키도 훤칠한 미인이었지. 그때 난 자네를 보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 아름답다는 걸 느꼈다네.

나는 자네를 2년 동안 국어를 가르쳤을 뿐 담임은 하지 않았네. 자네가 1학년 2반일 때는 나는 1학년 3반을 담임했고, 자네가 2학년 1반일 때 나는 2학년 2반을 담임했지. 하지만 단위 수가 많은 국어 교과라서 주당 4시간에다가 보충 수업 시간까지 더하면 거의 매일 자네를 만났을 걸세.

지나간 일화 한토막하겠네. 그때 자네 동기생 가운데 '김대중'이란 친구가 있었지. 자네 아버님의 함자와 똑같았지. 한자로도. 1981학년도 신학기 준비를 위한 직원회 뒤 반 편성 명단을 받은 자네의 담임 고용우 선생님이 자네와 김대중 학생이 한 반이 되면 자네에게 부담이 될 거라고 하면서 나에게 개학 전 미리 반을 바꾸자고 부탁하였다네. 그래서 김대중 학생을 내 반에 받고, 대신 내 반 한 학생을 자네 반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네.

그 김대중 학생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대학병원에 있다가 지금은 천안에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개업하고 있다네. 자네 때문에 나와 돈독한 인연이 되어 여태껏 연락하면서 지내네.

자네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9년에서 1982년은 가장 힘들었을 때라고 생각되네. 유신 정국의 마지막이요, '서울의 봄'이라 하여 잠깐 민주화의 희망이 보이다가 된통 서리가 내렸던, 그래서 자네 아버님도 연금 상태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로, 다시 사형수로 곤두박질쳤던 격동의 시기였으니까.

그때 자네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임무정(고1) 선생님, 고용우(고2) 선생님은 매우 생각이 깊으시고 훌륭하신 교육자로 자네를 음으로 양으로 무척 감쌌다네. 지금 임무정 선생님은 정년 퇴직 후 천안 근교에서 은거 생활을 하시고, 고용우 선생님은 1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가신 뒤 현재 보스턴 근교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네.

참 그때는 힘든 때였지. 멀쩡한 사람도 하루 아침에 용공이나 무능 부패자로 몰아서 직장에서 쫓아냈을 때로, 보통 사람들도 힘들었는데 자네 집안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데도 자네는 겉으로 조금도 내색치 않고 그 힘든 시절을 잘 이겨냈었지.

a

자네 동기생들, 이 얼마나 그리운 얼굴들인가. 1980. 8. 설악산 비룡폭포 앞에서, 필자는 왼쪽 끝에 서 있는 이. ⓒ 박도


자네의 재능대로 살아가기를...

자네가 고2 때 가을 어느 날, 교무실로 나를 찾아와서 교내 문예 응모작이라고 시 두편을 두고 갔지. 며칠 후 교내 문예 현상 공모를 마감한 뒤 심사를 하면서 나는 자네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렸네. 다른 학생의 응모작과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지만 그때 사형수의 아들인 자네에게 용기도 주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자네가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내 속내도 있었다네.

여수(旅愁)

고2 김홍걸

영원의 역전에서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빈 가방을 들고 서성대는 마음은
미지의 이웃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저마다의 행로가 달라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혼의 닮은 사람을 찾아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외면해버린다.

시간을 놓친 티켓처럼
인생이 쓸쓸해 웃는다.

가을

고2 김홍걸

무덤 뒤켠에 사는 시인은
거리에서 잔뜩 취하고는
곧잘 이곳을 지나간다.

그때마다 그는
들국화 따위를 짓밟고는
영원의 꿈에 젖고 싶었지만

그런 풍성한 가을은 이제
이 근처엔 없었다.

그 근처에 낯선 화가 하나가
맥 빠진 그림 같은 걸 그리고 있었다.

- <우리생활 17호> 1981. 2. 5


내가 알고 있는 김홍걸군은 문학과 철학, 역사를 좋아하는 과묵한 청년이었네. 자네는 새삼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자네의 이름이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는 무척 안타까웠다네. 사형수의 아들이 그새 그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의 아픈 기억들은 더 이상 들추지 않겠네. 이미 자네는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했을 테고, 한때 그런 호화 저택의 삶이 물거품이라는 것도 잘 알았으리라 믿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책에도 썼지만 "대통령의 아들이 대학가에서 분식점을 열다"라는 가십이 신문에 실리는 그날이 우리 나라가 진정으로 정치 문화 선진국이 되는 날이 아닐까 싶네. 곧 나는 자네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자네의 재능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라네.

내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 검색에서 자네 이름을 넣고 두드렸더니 자네 학력이 미국 UCLA대 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현직 미국 포모나대 태평양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나오더군. 자네 인생길은 자네가 알아서 잘 헤쳐나갈 테지만 한때 자네를 아꼈던 옛 훈장으로서 바람이 하나 있네.

나는 자네가 이 땅의 시인으로나 아니면 통일꾼으로 남북을 오가면서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현대사 특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그런 학자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이미 입춘은 지났고, 곧 우수가 다가오니 이제 봄도 머지 않은 것 같네. 누추하지만 틈내어 내가 사는 강원 산골 두메 내 집으로 찾아 주면 못다한 얘기도 나누며, 이곳 명물 안흥 찐빵도 대접하겠네.

아무쪼록 자네와 가족의 건강, 그리고 집안의 화목을 비네.

우수를 앞두고서 2005. 2. 14. 박도 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 어머어마하구나
  4. 4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5. 5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