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찾은 친구가 저승사람이라니...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78] 저승서 우리 다시 만나세

등록 2005.02.08 18:26수정 2005.07.06 14:3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1975년 11월 10일 친구로부터 온 엽서. 이제는 유서가 돼버렸다. ⓒ 박도


내가 자네를 찾는다는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나간 지 꼭 일주일 만에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메일을 받았다네.

선생님…. 제가 며칠 동안 장거리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박 선생님이 친구를 찾는다는 오마이뉴스 사연이 뉴욕 한국일보에 기사로 나갔나 봅니다. 서너 곳에서 전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는데, 확인한 결과 양 선생님은 10여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중동고 동창인 이동호씨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1-718-939-XXXX (댁) 또 한 분 여자 분인데요, 1-845-365-XXXX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선생님 마음 아프시겠습니다.
도영 드림


순간 뒤통수를 뭐로 맞은 기분으로 한참을 멍하니 지내다가 이 박사가 전해준 두 곳 전화번호를 눌렀네. 그랬더니 이동호씨와는 통화가 안 되었고, 자네 친구 정규철씨 따님이라는 분과는 통화를 할 수 있었네. 그분이 전하는 말도 이 박사의 메일 내용과 똑 같았네.

관련
기사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뜻밖의 비보

그래, 나는 자네의 친구가 아니야. 이 문명 세상에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나 되었는데도 생사도 모르면서 무슨 친구라는 말을 할 수 있겠나. 모든 게 내 잘못일세.

양·철·웅. 이제는 이승에서 아무리 불러봐야, "박도니, 나 철웅이야. 얘, 너 어쩜 그렇게도 소식이 없었니?"라는 다정한 자네의 그 계집애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네.

비록 저승에 있는 자네지만 비보를 듣고, 자네를 그리는 글이라도 한 편 쓰려고 하니, 슬픈 감정이 북받쳐 도저히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네. 그래서 하루를 보낸 후 이 글을 쓰네. 하지만 여태 내 마음은 슬픔으로 북받쳐 있고 좀체 가라앉지가 않네.

요즘 인터넷에 띄운 글은 시공을 초월하기에 이 글이 아마도 저승에 있는 자네에게도 전해지리라 믿네. "귀신 같이 안다"고 하였으니, 저승에 있는 자네는 내 마음을 환히 꿰뚫고 이 글을 줄줄 읽을테지.

나 지난해 학교를 그만둔 후 강원도 산골에 내려와 지내고 있네. 세 집밖에 살지 않는 두메에 살다보니 적적할 때가 많네. 벌써 추억에 젖을 나이인지 일주일 전 그 날(2005. 1. 30)은 잠도 오지 않아서 이런저런 지난날을 되새기던 가운데에 자네 생각이 불쑥 났어.

마침 그동안 편지를 모아둔 상자에서 꼭 30년 전, 자네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보내준 엽서를 찾았고, 그 엽서를 보니 더욱 자네가 그리웠고 그동안 무심했던 내가 미웠네. 하지만 자네의 거처를 몰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엽서를 스캔하고 자네를 찾는 사연을 담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신파조 제목을 달아 요즘 내가 연재 중인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75'에 올렸네.

네티즌이 알려준 주소

이튿날 이 기사가 화면에 뜬 지 몇시간도 안돼 다음의 댓글이 올랐네.

옛날 동창분의 주소는.. 조회수:396 , 추천:1, 반대:0
동준아빠(malaikaang), 2005/01/31 오전 11:16:27

42-60,Main St. 5G flushing, N.Y , 11355, U S A
TEL : 001-1-718-358-**** (자택)
001-1-718-219-**** (직장)입니다. 뉴욕에 계시나 봐요.

출처는 연세대학교 동문회 주소록 2004 발간을 참조하였습니다.
혹시 안맞을 수도 있지만 친구 분의 소식을 꼭 듣게 되길 기원합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참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몹시 부끄러웠네. 이렇게 쉽게 알 수 있는 자네 주소를 왜 그동안 찾지 않았던가. 연대 동문회관은 내가 28년간 근무했던 이대부고 바로 길 건너편에 있지 않은가. 거기에 은행 일로, 차를 마시러, 결혼식 하객으로, 주례자로 숱하게 드나들면서 한번도 동창회 사무실에다 자네의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동준아빠'에게 무척 미안했네. 그는 자기 컴퓨터를 켜면 곧장 내 글이 화면에 뜨도록 장치를 해 둔 나의 열렬한 팬이라네.

그 댓글을 보고 나는 곧장 전호번호를 눌렸네. 그런데 자네 자택은 신호가 간 뒤 한참 후에야 영어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고(아마도 부재 중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인 듯), 직장 전화는 시간이 맞지 않는듯 받지를 않았네.

마침 지난해 백범 선생 암살배후를 찾고자 미국 방문 중 알게 된 이도영 박사가 자네 주소와 가까운 곳에 살기에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메일을 보냈네.

뉴욕 한국일보에 사연이 실리다

안녕하세요, 이 박사님! 날씨가 몹시 춥습니다. 네티즌의 도움으로 고교 때 짝이었던 양철웅이라는 친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30년 만에 알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여러번 전화를 걸었으나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이 박사님께서 전화하셔서 그 친구가 과연 그곳에 살고 있는지 알아봐주십시오.

메일을 보낸 지 몇 시간 뒤 이도영 박사로부터 아래의 메일이 왔네.

친구분 통화가 안됩니다. 두 개 전화번호 모두 잘못된 번호라고 합니다. 주소로 한 번 편지를 띄워보겠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돌아오든지, 아니면 이사 간 곳으로 따라가니까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도영 올림

<친구 찾기 부탁>
뉴욕 한국일보에 잘 아는 분(Dr. Kim)이 있어서 부탁했더니만, 찾기에 힘써 주신답니다. 기사로 내보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도 복사해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연세대 동문회 연락책도 찾고 있습니다. 또 이곳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에게도 연락하려고 합니다. 다방면으로 찾아봐야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요. 도영 올림

동준아빠(malaikaang) [2005-02-03 14:18]
꼭 찾으시리라 믿습니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목 자른 군화'의 추억

a

나의 중동고교시절(고2, 1963년), 사진이 귀하던 시절이라서 그 친구의 사진은 없다 ⓒ 박도

사실 그때까지는 이 박사가 자네의 거처를 꼭 찾아줄 것으로 믿으면서 내 마음 속으로는 올 가을쯤 자네도 만날 겸,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가볼 생각도 했네.

마침 얼마 전에 이 박사도 우리 내외를 초청하였고, 그동안 나만 혼자서 세계 여러 나라를 쏘다녀서 아내에게 미안도 하고, 올해는 회갑 해인데다가 내가 쓴 책도 올 봄과 여름에 여러 권 나오기에 그 인세를 모으면 여비는 나올 것 같았거든. 자네와 뉴욕 공항에서, 마치 지난날 중동고등학교 농구장에서 얼싸안았던 그때와 같은 감동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그림도 그렸네.

이런 무지개 빛 꿈에 젖어있으면서 이 박사로부터 자네를 찾았다는 소식을 학의 머리처럼 뽑고 기다리던 차에 자네의 비보를 들었네. 이 세상에서 나는 자네에게 받기만 하고 한번도 갚지도 못했는데 자네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으니 더 할 말이 없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우리 옛말에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말로 답하겠네. 나는 자네를 만나던 그 시절에 너무 가난했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돈이 없으니 도시 기를 펼 수가 없었네. 매일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멋있게 죽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으니 자네에게 비친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촌닭 한마리였을 거야.

나는 자네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석달 만에 휴학했고, 이듬해 내가 다시 1학년으로 복학하던 날 운동장 조회에 나가면서 농구장에서 2학년으로 진급한 자네와 얼싸 안았지.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 우리 교복 깃에 달았던 'Ⅰ' 'Ⅱ' 'Ⅲ'이라는 그 숫자는 내가 자네를 가까이 대하지 못했던 요인이었나 봐.

그때 고교생들은 멀리서 목깃의 그 숫자만 보고도 상급생에게 경례를 해야 했고, 만일 경례를 하지 않으면 엉덩이가 얼얼하도록 터지던 시절이었지. 우리 모교는 유독 선후배의 기율이 엄했잖아. 그래서 지난해 동급생이었던 친구들에게 경례를 하는 게 그때 나는 정말 고역이었어. 그래서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입대하였고, 제대한 뒤 곧장 교단에 몸담아 33년을 근무하고는 명퇴하여 지금은 산골에 살고 있네. 교단에 선 뒤로도 참 힘들게 살았어. 나는 모교에 가서도 배겨내지 못하고 1년 만에 뛰쳐나왔던 '모난 돌'이야. 오염된 대기를 마시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별 수 없이 실컷 들이키고는 지금은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사는 꼴이라고 할까.

아직도 작품다운 작품은 못 쓰고 연습만 하고 있어. 다행히 이곳에 내려온 뒤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네. 이제는 지난날 빚진 것을 갚으면서 살려고 하는데 다 갚을지 모르겠네.

짧은 글에다가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어찌 다 담겠는가. 언제 틈 보아 그 시절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자네의 우정을 기리겠네.

자네가 준 모자와 목 자른 군화, 정말 고마웠어. 요즘 아이들은 돈 주고 신으라고 해도 신지 않을 '목 자른 군화'지만, 그때 나는 그게 참 고마웠어. 신문배달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뛰어다니니까 발뒤꿈치에서 피가 났고 또 금세 닳아버렸는데, 자네가 준 목 자른 군화는 뒤축만 갈면 오래 신을 수 있었고, 특히 겨울철 눈 오는 날에는 군화에다 새끼를 감으면 넘어지지 않아서 좋았어.

저승에서 기다리게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이도영 박사로부터 또 메일이 왔네.

슬픈 사연과 만남들…

이동호 선생님과 직접 통화 방금되었습니다. 양철웅씨는 1992년 식도암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용호 목사님이 장례식을 치렀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분들 얘기를 종합하여 보니, 운명 직전에는 이동호 선생만 만났다고 하고, 다른 분들과 일체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합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동호 선생님은 박 선생님을 잘 기억하고 있더군요. 전화해 보셔요. 도영 올림


a

친구 철웅이를 마지막으로 인도한 이용호 목사의 고교시절(고2 때 짝) ⓒ 박도

손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자네의 마지막을 지켰다던 이용호(그는 나의 고2 때 짝) 목사님이 뉴저지에서 전화를 했네. 자네는 1992년 암으로 혼자서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났다고. 그런데 자네는 모든 걸 달관한 듯 담담하게,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하네.

"내 무덤은 만들지 말고 화장을 해서 산에 뿌려달라"고 해서 그대로 해줬다고 이 목사가 울먹이면서 말하네. 자네도 가정적으로 어려워서 평생을 혼자 지냈다는 내가 전혀 모르는 얘기를 이 목사가 전했어. 난 자네가 참 다복한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던 자네가 참 훌륭해 보이네. 나는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데굴데굴 거렸던 속 좁은 사람이었는데….

철웅이, 저승에서 기다리게. 나도 머지않아 곧 가게 될테지. 그때 우리 참 이야기 많을 거야. 지난날 수업시간처럼 몰래 수다 떨다가 염라대왕에게 야단맞지나 않을는지.

운성 철웅이, 설송 박도가 이승에서 절 드리네. 저승에서 만날 때까지 자네의 명복을 비네.

섣달 그믐날 이승에서 친구 박도 올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5. 5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