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에 가득 찬 맑은 물(횡성댐), 이는 귀중한 자원이다박도
이런 겨울 가뭄은 평생 처음이라고 이 동네에서 태어나 입때껏 이 동네를 떠나서 산 일이 없는 노씨는 무슨 재난이냐고, 아무래도 사람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원을 흔전만전 마구 써서 그런 것 같다고 큰 걱정을 하신다.
보름 전부터 그나마 졸졸 받아먹던 상수도가 메말라 버렸다. 수원지를 손보았지만 그동안 수도관 파이프에 물이 흘러내리지 않자 고인물이 강추위에 단단히 얼어버린 모양이다. 수도꼭지에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이즈음 우리 집은 이웃에서 얻어다 먹다가 어제부터는 수원지 샘물의 파이프로 내려가는 구멍을 막고서 그 물을 길어다 먹는다. 하루에 한두 차례 물 길어먹는 일이 조련치 않다. 다시 원시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팔자 길들이기에 달렸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았을 테다. 하지만 물을 물 같이 흔하게 쓰다가 이런 물 곤란을 받으니 생활이 말이 아니다. 심지어 아내는 밀린 빨랫감을 가지고 서울 아이들이 사는 집에 가서 해 왔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 김동환 <북청 물장수>
이 시는 1920년대 서울 장안의 북청 물장수를 그렸지만, 내가 시골에서 서울로 갔던 1960년대에도 고지대 동네에는 물장수가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민들이 오늘처럼 그야말로 물을 물처럼 헤프게 쓴 것도 1990년대 이후다.
물 한 모금에 감사하라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여동생과 같이 서대문 형무소 뒷동네에서 자취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방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그곳이었는데 지금의 금화터널 들머리 부근 산동네였다. 고지대고 무허가 집이라 수도가 놓였을 리가 만무다. 그래서 매일 이른 새벽에 물지게를 지고 산 아래 공동수도(독립문 바로 옆 자리)로 내려갔다.
하지만 공동수도에는 이미 수십 개의 물통들이 줄을 서고 있다. 가장 짜증나는 일은 아줌마들이 자꾸 새치기를 하기에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뒤에서 참다못해 가서 따지면 자기 물통의 연속이라고 마냥 우겼다. 억센 산동네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 30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두 초롱을 받아서 그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면 물통의 물 가운데 1/3은 길바닥에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 물을 물동이에 부어두고는 밥도 해먹고 청소도 하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했다. 세수한 물은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 물에 걸레를 빨았다. 자연히 물 한 바가지를 엄청 귀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 동네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달동네는 그렇게 살았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는 철조망 밖으로 흘러나온 물에다가 애벌빨래를 했던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가 바로 30~40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수자원 개발과 상수도 보급으로 지금은 도시, 농촌 없이 물을 흔케 쓰고 있다.
노씨 말을 빌리면, 우리가 먹는 이 샘물은 조상 대대로 당신네 가족들이 흡족히 먹고 살았다고 했다. 요즘 이렇게 물 곤란을 받는 것은 가뭄 탓도 있지만 두 집 먹던 물을 세 집이 먹고, 거기다가 수세식 화장실, 세탁기를 돌리기에 옛날보다 엄청 물 사용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분의 말이 맞다. 현대인의 물 사용량이 생활수준과 비례하는 양,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매일 더운 물로 샤워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신세대가 많다. 내 집 아이도 그러니까.
그런데 문제는 물의 양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데 물 사용량은 늘어나고, 무분별한 수원지 개발로 그나마 있는 물이 오염되고 있기에 문제다. 지난날은 아무 개울물이라도 마셔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깊은 산속 물도 그 위에 사람이 살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마셔야 뒤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