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신비 간직한 고려시대 목선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39] 영산강 '나주배'

등록 2005.02.14 07:57수정 2005.02.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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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봄, 나주시 송월동 영산강에서 발견된 나주배 용골(길이 9.2m) 파편 ⓒ 이철영

겨울 들녘은 황량하고 고적하다. 시간조차 정지되어 흐르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흙 속에 삶의 뿌리를 내려보지 못한 게으른 자의 상념일 뿐이다. 저 들녘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기대어 살며 명멸해 갔을 것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빛과 어둠은 시간과 지층 속에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다. 우리는 결코 소유하지 못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존재할 뿐이다. 강물이 몸뚱일 뒤척이며 대지의 자궁 속을 흐른다.

영산강은 곡창 나주평야를 적시며 이 땅 백성들을 먹여 살렸고, 고대에서 근대까지는 서남해안 지역 수상교통로의 중심이었다. 때론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펄럭이며 힘차게 흘렀을 그 강물은 이제 목숨을 다한 듯 힘겨운 숨을 헐떡인다. 댐들은 물을 모두 가두어 버리고, 수량이 줄자 유속도 느려져 토사가 강바닥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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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편이 발견된 지점에서 바라 본 영산포. 오른쪽이 나주시내에서 영산포로 건너가는 영산대교. ⓒ 이철영

2004년 봄, 강은 제 몸 속에 천년 동안 감추어 둔 비밀을 하나 꺼내 보였다. 영산대교 부근 나주시 송월동의 메마른 강바닥 위로 골절된 뼈마디처럼 침몰선의 잔해가 드러났다. 용골(龍骨, 배 바닥에 놓여 선수부터 선미까지 잇는 재목)로 짐작되는 선편(船片)으로 미루어 볼 때 나주선은 최장 42미터에 이르는 고려 초기의 초대형 선박으로 추정된다. 배 만드는 데 쓰인 목재의 수령은 오백년에서 천년 사이. 강과 함께 한 시간까지를 포함하면 실은 1500년에서 2000년의 세월을 견뎌온 선편(船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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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등처럼 갈라진 목재의 표면. 썩은 부분만이 갈라 터진다 함. ⓒ 이철영

건져놓은 선체의 뼈다귀에 코를 대고 킁킁거려 보니 막 톱질한 것처럼 짙은 나무향이 느껴졌다. 1500년이면 모든 것이 무화(無化)될만한 세월이 아닌가. 나무는 세포벽 안에 고집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1983년에는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완도선이 발견되고, 1995년 목포 달리도 앞바다, 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 앞바다 고선박에 이어 4번째 고려시대 선박의 발견이었다. 앞선 추측을 내놓은 이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군함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삼은 '고려사'를 보면, "태조는 군선 100여척을 더 건조하였는데 그 중 대선(大船)은 10여 척으로 각각 사방이 16보요,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거기서 가히 말을 달릴 만하였다고 했다. 태조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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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고려, 조선시대의 조운선 모형. 나주선과 동일한 양식의 한선. ⓒ 이철영

태조 왕건은 신라 효공왕 7년(903년) 나주와 부근 10여 군현을 공략하고 군대를 남겨 두고 갔는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나주, 진도 등의 서남해지역 원정에 나섰다. 왕건은 그때마다 대규모의 수군을 움직였는데 4차 원정엔 군선 70여 척에 병사 2천명이었으며 군선 100여 척과 병사 3천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왕건은 당시 벽란도를 거점으로 국제무역을 주도하던 송악(개경)의 호족 출신이었으며 내륙과 연안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중요시하여 실제 군선과 군대를 동원한 바 있는 태조 왕건이 침몰선의 주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산강에서 발견된 이 배는 적어도 전함(戰艦)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안해저유물선과 완도선 복원에 참여했던 김익주씨(나주 영산강 고선박 조사위원, 48세)는 "고려 초기의 선박임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배의 밑바닥인 저판재의 두께가 얇아 수군에 딸린 수송선이거나 아니면 내륙 수로만을 왕래했던 거룻배로 보입니다. 목포 '달리도선'의 저판재는 상대적으로 아주 두꺼운데 나주선은 얇아서 전투를 하거나 암초가 있는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조운선 등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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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끼리 연결하는 나무못 구멍. ⓒ 이철영

영산강 유역의 고대수역은 현재와 비교해 6배 이상 넓었다고 한다. 완도선의 규모가 10톤 정도인 것으로 감안할 때 나주선은 3배가 넘는 30톤 이상의 대형선박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다 같은 강물 위를 대규모 함대가 내달리고 거대한 선박이 미끄러져 가던 당시를 그려보는 상상은 즐겁다.

영산강의 수운을 담당하던 배의 존재는 지금까지 옛 문헌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을 뿐 아무도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일제 이후 영산포가 수운의 중심이 되고, 이후 가속화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이전 시기의 모든 흔적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도 남은 선편(船片)들에 대한 영산포 일대의 추가 탐사를 통해 전체의 선박형태를 복원해내고, 여러 포구의 계류, 접안시설 등에 대한 발굴 조사도 진행되어야 하나 나주시의 재정으로는 힘든 실정이라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나라에서라도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작게는 선박의 역사, 수로, 교통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자, 서남부지역 역사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영산강의 삶과 문화, 전체를 복원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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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밑판과 옆면을 연결하는 ‘ㄴ’자형의 만곡부재 (길이 5.6m).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2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oil'사보 2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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