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8회

등록 2005.02.14 07:53수정 2005.02.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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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꺼내면서도 미리 이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말할 기회도 없었고,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기에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일행은 의아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그럼 구양백부님의 의동생된다는 말이오?”


팽악이 되묻자 구양휘가 고개를 끄떡였다.

“말하자면 조금 길어. 본가의 비전검보는 본래 두권으로 나뉘어져 있어. 한권은 본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고, 익혀야 하는 것이지. 하지만 또 한권은 아무도 있는지조차 몰라. 설사 본가의 가솔들이라도 말이지.”

구양휘는 탁자에 앉자 찻물로 목을 축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가법(家法)에 따라 가주(家主)나 차기 가주가 될 장자(長子)만이 익힐 수 있는 검보였어.”

대개 무림세가는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따로이 가지고 있는게 현실이었다. 가주는 가주로서의 권위를 가져야 했다. 또한 그것은 그들 세가를 지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비기(秘技)이기도 했고, 대대손손 가문의 적통(嫡統)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 검보가 사십년 전 갑자기 사라졌어. 무공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던 가솔 중의 한 인물이 우연히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훔쳐 달아 난거야. 집안이 난리가 나고 찾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지.”

그런 이유로 구양가가 그 뒤로 한동안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칫 누군가가 하권의 검보를 가지고 구양가를 위협한다면 꼼짝없이 끌려가야 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을 것이다.


“사실 그 하권의 검보는 따로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 본가의 심법과 검법을 완벽히 익혀야만 가능했지만 검로(劍路)라던가 초식이 알려지게 되면 아무래도 그 위력를 십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집안 어른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지.”

그런 이유로 만일에 대비해서 더욱 구양휘를 철저하게 단련 시켰을 것이다. 문을 닫아 걸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구양휘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래서 위기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양가는 구양휘로 인하여 그 이전보다 더욱 탄탄한 위치를 굳혔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십팔년 전 거사께서 본가를 방문한 거지. 아무 조건 없이 본가로 돌려준 거야. 생각해 봐. 본가 어른들이 어떻게 대했겠어. 가보(家寶)라도 주고 싶었을 거야. 헌데 거사께서는 한사코 거절했지. 결국 아버님이 구거사와 의형제를 맺고는 결말이 났어.”

무림세가에 있어 가문의 비전지기는 곧 세가의 성쇠(盛衰)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검보라면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검보를 찾아 주었다면 그것은 곧 그 무림세가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구양휘의 어조가 갑자기 퉁명스러웠다.

“의도했던 의도를 하지 않았던지 간에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던 것이 모두를 얻은 거와 마찬가지였지. 괜히 만박거사겠어? 처음에는 별로 달갑지 않았어. 갑작스레 내가 네 놈의 숙부라는 데 할 말이 없더군. 아버님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그 뒤론 어쩔 수 없이 부탁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왜 구양휘가 구효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지 이해되었다. 의형제도 형제다. 그 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 그 아랫대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구양휘가 불쌍하다거나 안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하기 싫은 일이라면 구효기 아니라 그의 부친이 부탁한다 해도 하지 않을 사람이 구양휘였기 때문이다.

“이제 대형과의 관계도 들었으니 우리도 꼼짝없게 생겼구려.”

팽악의 말에 일행은 실소를 흘렸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안 이상 구효기를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도영이란 인물도 그렇고 거사께서도 쉽게 당할 분은 아닌데 저 지경이 된 것은 심상치 않아 보이오. 상처로 미루어 보아 상대는 적어도 십여명이 넘는 것 같소.”

구양휘는 고개를 끄떡였다. 모용수의 지적은 정확했다. 자신이 아는 한 구효기는 저리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는 구효기를 반드시 죽이려고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고 그 암습은 거의 성공이라 해도 무방했다. 만약 자신에게 오지 못했다면 구효기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갈인규가 그 일행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천우신조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올 수도 있겠지.”

나직하게 이빨 사이로 흘리는 구양휘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어쨌든 구효기는 그의 숙부였다. 그를 저리 만든 자들을 용서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아마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구양휘는 벌써 그들을 쫒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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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馬車)란 대개 그것을 타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지위, 부(富)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 하나로 마차에는 화려한 장식을 달고 심지어 금과 같은 보석으로 꾸며서 부(富)를 과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장안을 빠져 나가는 마차는 달랐다. 일체의 눈에 뛸 만한 장식도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색깔 자체도 짙은 회색이어서 어둠과 동화되기에 가장 알맞은 빛깔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마차를 끌고 있는 네필의 건장한 말들도 잡털이 섞이지 않는 검은 빛깔의 오룡마(烏龍馬)였고, 마부도 전신이 시커먼 곤륜노(崑崙奴)였다.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고, 낡아 보이는 가죽으로 만든 바지를 입었는데 두 어깨와 가슴은 호랑이 털로 보이는 가죽으로 대충 가린 상태였다. 그는 말을 모는 솜씨가 훌륭한 마부였다. 그의 두 손은 익숙하게 말고삐를 잡아 당겼고 채찍을 휘두르며 네필의 준마를 빠르게 달려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사실 관도가 아닌 이런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마차를 몰 수 있는 마부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이 마차가 일반 마차가 아닌 특수하게 제작된 튼튼한 마차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급한 일이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어둠을 틈타 산길을 달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구릉을 타고 한 고개를 넘은 뒤 내리막길을 달리던 곤륜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일정거리 정도는 볼 수 있는 그의 눈으로 커다란 나무둥치가 쓰러져 앞을 막고있는 모양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빠르게 마부석 왼쪽에 있는 쇳대를 마차바퀴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히이---잉--- 푸르르---

말들은 맹렬한 속도로 달리다가 곤륜노의 고삐에 따라 속도를 급하게 줄이면서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마차바퀴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는 사람이 안으면 한아름이나 될 것 같은 나무둥치 앞 이장거리에 멈췄다. 아마 길 옆의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그냥 본래의 속도대로 달려갔다면 말들은 뛰어넘었을지 모르지만 마차는 박살이 났을 터였다.

그는 가래침을 땅에 밷으며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러다 문득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십여명의 인물이 나무둥치 저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보지 못한 듯 개의치 않고 앞으로 걸어가 나무둥치를 안아 들었다. 나무둥치는 사람 혼자 들 수 없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십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굵은 거목이었다.

“끄--응--”

힘을 쓰는 소리가 들리며 나무 한쪽이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거워서 신력을 타고났다는 그조차도 질질 끌면서 길옆으로 치워야 했는데 그는 무언가 곤란한 듯 나무 한쪽을 들어 올린 채로 퉁방울 같은 눈동자를 뒤룩거렸다. 안으로 돌리면 마차를 뒤로 밀어야 할 것 같고 바깥으로 돌리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십여명의 인물들을 미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받고 싶은가?”

그때였다. 왼쪽에 서 있던 인물이 불쑥 입을 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두워 모습은 확실치 않았지만 그의 왼손에는 도를 들고 있는 듯 했고 흑의를 입고 있었다. 그 말에 곤륜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히쭉 웃었다. 생긴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라 흉하게 보였지만 순박하고 단순해 보이는 모습으로 도움에 대해 진정으로 고맙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덩치와 생긴 것과는 달리 온순한 모양이었다.

번---쩍--- !

허나 곤륜노에게 다가든 흑의인의 도가 뽑혀지며 느닷없이 섬광이 피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줄기 도광이 곤륜노의 목줄기를 긋고 있었다. 도저히 예상치 못한 일격이어서 곤륜노는 당장이라도 피를 쏟고 절명할 것 같았다. 허나 순박하고 미련해 보이는 곤륜노가 자신이 들고있던 나무둥치를 얼굴까지 들어 올려 앞으로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땅바닥을 서너차례 굴렀다.

정통적인 신법이나 보법이 아니었지만 곤륜노는 다행히 흑의인의 도를 가까스로 피했고, 사실 그 움직임은 그 순간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마치 항상 느린 것 같지만 필요할 때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다는 곰과 흡사했다.

“역시 한 수 있는 놈이었군. 하기야 금적수사 부부를 태운 마차를 모는 놈이니 간단치는 않겠지.”

다가 온 흑의인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급작스런 일도도 상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 반드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의 도에서 다시 섬광이 뿜어졌다면 곤륜노로서는 피할 수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흑의인은 이미 시선을 마차로 돌리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이제 수사께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그 동안 수사를 흠모했던 이 심모(沈某)에 대한 최소한의 정리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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