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일본어 가이드' 나카노 마유미씨

<낙안 민속마을의 사계>

등록 2005.02.27 15:39수정 2005.02.2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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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남쪽 성곽에 오르면 바다와 맞닿은 벌교 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곳엔 말을 타고 창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왜군들의 함성이 있다. 점점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나는 활시위를 힘껏 뒤로 당긴다.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본어에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초가 아래로 한 그룹의 일본인이 관광을 하고 있다.


a 마유미씨가 관광객들에게 낙안읍성 초입의 성곽안내판에서 중점적으로 봐야 할 곳이 어느곳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유미씨가 관광객들에게 낙안읍성 초입의 성곽안내판에서 중점적으로 봐야 할 곳이 어느곳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서정일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던 때, 피해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읍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낙안읍성. 성곽 아래의 흙은 우리네 조상들이 그들과 싸우다 피를 흘리며 죽어서 만들어 놓은 조상의 뼈와 살이다. 그런데 서로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도 많은 이곳에서 의아하게도 아직 발음도 정확치 않은 한 일본여인이 관광객들에게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며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가 바로 낙안읍성 일본어 가이드 나카노마유미(46)씨.

마유미씨는 12년전 한국 총각과 결혼해서 낙안면 금산리 347번지 시골에서 한국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생소한 외국 땅, 그것도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한국에서 적응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큰 버팀목이 된 것은 남편과 낙안읍성이었다고 한다. 과묵한 성격에 말 수가 적은 남편이지만 자상한 모습으로 늘 곁을 지켜줬고 고향이 생각날 때면 올라와 거닐던 낙안읍성 성곽은 고향과 같은 포근함으로 그녀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a 책자와 팸플릿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것은 그녀가 가이드를 하면서 꾸준히 해 오던 생활로 인터뷰 도중에도 틈틈이 책자를 보면서 낙안읍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책자와 팸플릿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것은 그녀가 가이드를 하면서 꾸준히 해 오던 생활로 인터뷰 도중에도 틈틈이 책자를 보면서 낙안읍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 서정일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남편의 권유도 있었지만 아이도 학교를 다닐 정도로 성장하니 한일 양국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뭔가 뜻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 순천시의 일본어 관광가이드 양성코스에 2기로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어 관광가이드 나카노마유미로 다시 찾은 낙안읍성은 그녀의 마음속에 새롭게 다가왔고 누구보다 더 열성적인 가이드생활을 하게 된다.

마유미씨의 주된 업무는 일본인을 상대로 낙안읍성을 설명하는 일. 하지만 찾는 이가 없는 날이면 한국인을 대상으로도 설명을 한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일본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다녀간 사람들이다. 서울과 거리차이가 있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처음 들르는 사람은 비교적 적은 편, 그러나 요즘은 간간이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해서 하나라도 더 설명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a 3.1운동기념탑앞에서 탑의 의미에 대해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마유미씨, 비록 일본인이지만 과거사에 관해 객관적이고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때의 일들에 관해 소소한 것까지 자세히 설명한다고 한다

3.1운동기념탑앞에서 탑의 의미에 대해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마유미씨, 비록 일본인이지만 과거사에 관해 객관적이고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때의 일들에 관해 소소한 것까지 자세히 설명한다고 한다 ⓒ 서정일

"고향 같다고들 합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모두 그런 마음을 갖는다고 얘기하는 마유미씨,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그들에게서 어떤 때는 한국 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끔 '이곳의 설명을 왜 일본사람에게 들어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안내 받기를 거부하는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속내를 말한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심지에서만 생활한 그녀가 한국 농촌으로 시집와서 시부모를 모시는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고 아들의 초등학교 역사교과서로 한국을 다시 공부하면서 양국을 위해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일'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하고 있는 가이드생활.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고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한국 사람들의 가슴속에 감정의 골이 깊어 그것을 치유하는데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객사앞 3.1운동 기념탑에서 다른 곳보다 긴 시간을 할애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는 참된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면서도 만감이 교차함은 나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낙안읍성
http://www.nagan.or.kr

덧붙이는 글 함께 만들어가는 낙안읍성
http://www.nag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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