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31

남한산성 - 쟁기 끄는 소

등록 2005.02.28 17:01수정 2005.02.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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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모였는가?”

수어사 이시백은 각 영의 초관들을 모아 놓고서 점고를 한 후 검붉은 얼굴을 한 자를 불러 소개했다.


“이 분은 오랑캐들과 함께 생활한 바 있어 저들의 싸우는 바를 잘 알고 있다. 부족하나마 여기서 말을 새겨듣고 각 영에서는 좋은 지침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검붉은 얼굴의 사내는 자신을 박난영이라 소개한 뒤 청군의 구성부터 얘기하였다.

“오랑캐들은 만주팔기(八旗)라는 조직으로 기병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각각은 깃발로 구분되는데 요즘에 들어서는 몽고팔기가 조직되었고 한인(漢人)으로 조직된 한인팔기까지 있다.”

박난영은 잠시 초관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초관들의 얼굴은 지쳐 있었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 하지만 오랑캐들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말에 의지하여 싸운다. 성을 치는 데 있어서는 서툴기 작이 없으니 버티며 기회를 노리면 된다. 오랑캐들이 명나라의 영원성을 칠 때, 그 왕이 포에 맞아 크게 상처를 입고 끝내 물러간 일을 아느냐?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제대로 된 포루가 없소이다.”

장판수의 말에 박난영은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했느냐?”
“남한산성에는 제대로 된 포루가 없다고 했소이다. 게다가 사방이 막혀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양식이 떨어져 패할 것이외다.”

박난영은 큰 소리로 외쳤다.

“고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렇게 맥 빠지는 소리를 하니 어찌 오랑캐를 쳐부수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강홍립을 보낸 선왕의 책략이 필요한 것을!”

옆에서 이를 듣고 잇던 이시백은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박난영이 말하는 강홍립을 보낸 선왕이란 분명 광해군을 얘기하는 것인데 폐위된 왕을 두고 선왕이라 말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다른 뜻을 가진 이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군관 하나가 달려와 박난영에게 급한 전갈을 전했다.

“지금 오랑캐들에게 갈 사람이 필요하니 급히 준비해 주시오.”

박난영이 그러한 일을 맡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박난영은 강홍립을 따라 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정묘호란때 그들의 길잡이를 했고, 다시 조정에 복귀한 후에는 낮은 직급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래로 인해 자주 청을 왕래해야만 했다.

“허허...... 이제 와서 저들에게 무엇을 하겠다고 그러는 것인가.”

박난영은 군관을 따라 가려다가 장판수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어찌되는가?”
“장판수요!”

박난영은 씁쓸히 웃으며 자신의 환도를 풀어 주었다, 손잡이가 가오리 가죽으로 되어 있는 것이 흔한 물건은 아닌 듯 보였다.

“이걸 자네가 가지게.”

장판수는 박난영에게 한 바탕 욕이라도 얻어먹을 각오였는데 뜻밖의 물건을 받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젠 내게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네. 장초관이라면 이 칼을 잘 쓸 듯 하이.”

칼을 건네 준 박난영은 그 길로 가서 잠깐 동안 벼락재상이 된 호조판서 심집과 가짜 세자 능봉군을 만나 전후사정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가짜재상 심집의 태도는 매우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난 평생을 말에 거짓이 없게 살아 왔네. 오랑캐를 만나도 말과 태도를 제대로 못할 것인 즉, 자네가 잘 전해 주게나.”

보기에 따라 심집은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마치 안 될 것을 바라고 있는 듯도 했다. 박난영은 속으로 크게 낙담하며 심집에게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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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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