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32

남한산성 - 쟁기 끄는 소

등록 2005.03.03 17:01수정 2005.03.0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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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장수 마부대는 조선의 재상과 세자라고 온 자들이 처음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다. 세자의 굳은 표정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재상이라는 자는 마치 일부러 보라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선을 마주치질 않았다. 마부대는 붓을 들어 글을 써 보여주었다.

‘저 사람이 진짜 세자인가?’


심집은 멀뚱히 글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국 말을 아는 박난영이 대신 대답했다.

“진짜 세자이고, 진짜 재상이외다.”
“네게 물은 것이 아니다!”

마부대가 소리를 지르자 심집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묻지도 않는 말을 내 뱉었다.

“나는 재상이 아니외다! 또한 이 사람도 세자가 아니외다!”

마부대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자신들의 역관이 당도했는지를 물었다.


“통사 정대인이 후진에 당도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정대인을 불러라!”

마부대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통사 정명수를 본 박난영은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정명수는 박난영처럼 청군에게 항복한 자였지만 박난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청의 벼슬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박난영과는 달리, 관의 노비로 있다가 정묘호란 때 청의 편에 가담한 그는 청의 황제에게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밀고하고 충성을 맹세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그곳의 관직을 받아 눌러 앉은 점이다. 박난영을 알아본 정명수는 가볍게 눈웃음만 지은 후 마부대의 말을 받아 능봉군에게 물었다.


“진짜 왕세자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나름대로 소임을 다하려는 능봉군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답했다. 정명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심집을 향했으나 그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말이 정녕 맞사오이까?”

심집은 한 참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재상이 아니고 이 사람은 세자가 아니외다!”

박난영은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심집의 옷깃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왜 거짓을 고하는가!”

심집이 박난영의 손을 잡아 떼어놓으려 애를 쓸려는 찰나 박난영은 손을 놓고서는 스르르 뒤로 쓰러져 버렸다.

“어억!”

능봉군이 비명을 질렀고 바닥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정봉수의 설명을 들은 마부대가 뒤에서 박난영을 찔러 버린 것이었다.

“이놈들! 너희들이 우리 대(大)청국을 능멸하려 함이냐! 당장 성으로 돌라가 진짜 세자와 재상을 보내어라!”

정명수의 호통소리에 심집과 능봉군은 청의 병사들에게 내몰린 후 달음박질 쳐 성안으로 돌아왔다. 가짜 대신과 세자를 보냈다는 전말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난영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성안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오랑캐놈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어찌 사신으로 간 사람을 함부로 벤단 말인가?”

아침나절만 해도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병사들의 얼굴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장판수는 박난영이 주고 간 환도를 보며 한숨만 쉬었다.

“이 사람 팔자가 기구하이. 예전에 오랑캐를 치러 가서는 그냥 항복해 버리더니 이번에는 칼조차 놓고 가서는 헛되이 죽어버리다니.”
“무슨 소리 하는기야? 헛되이 죽긴!”

휘하 병사들이 하는 말에 장판수는 소리를 버럭 지른 후 환도를 움켜쥐고 이를 한 번 뽑아보았다. 환도에는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散’

글자가 그리 깔끔하게 새겨진 것은 아니고 마치 나중에 억지로 후벼 판 듯해서 장판수의 눈에는 오히려 칼의 모양새를 망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내래 보기는 말이야, 윗 놈들이 죽인 일이야. 그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초면인 나한테 칼을 주고 갔겠어? 벌써 느낌이 안 좋았다는 것이갔디! 어이 이보라우!”
“예”
“이 칼에 있는 글자 좀 한 번 갈아 없애보라우! 이거 뭐 이리 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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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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