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학교를 알려거든 '학교대사전'을 보라!

'자폐'가 아닌 '풍자'를 선택한 아이들의 건강한 일탈

등록 2005.03.01 10:55수정 2005.03.02 12:15
0
원고료로 응원
a 학교대사전

학교대사전 ⓒ 안준철

쓸데없는 짓을 했다. '학교대사전' 리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문제의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우선 인용할만한 단어나 문장들을 종이에 적어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ㄱ'에서만 무려 15개. 이대로 가다가는 헛일이다 싶어 독한 마음을 먹고 빼어난 것들만 가려 뽑은 것이 모두 60개가 넘었다.

그것만 열거해도 약속한 분량이 넘치겠다 싶어 서둘러 재심에 들어갔지만 탈락된 것이 고작 6개였다. 3심과 4심을 거치는 동안 죄 없는 내 머리털만 뽑혀나갔고, 아무리 용을 써도 50개 이하로 줄이는 것은 내 능력 밖이었다. 결국, 무용지물이 된 종이를 구겨 던지며 나는 단 한 줄의 리뷰를 이렇게 토하고 싶었다.

"직접 읽어보시라!"

*골품제도- (과거) 성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반장, 부반장, 전교회장 등의 출마를 규제한 신분제도.

*관습법- 교칙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도 단속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0순위 교칙. 교칙을 만들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이 나타나면 이 법을 적용한다.

*공납- 압수신공으로 뺏긴 핸드폰을 돌려받기 위해 바치는 세금. 음료수, 빵 등의 특산물을 주로 바친다.


'ㄱ'에서 무작위로 뽑은 것들이다. 이 셋 중에서 둘을 탈락 시키고 하나만 고르라하면 그게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도 이들은 경량급에 속한다. 요건 어떤가?


*고삼- 아플 자유도, 딴청 필 자유도, 게다가 놀 자유는 더욱 없는 다소(?) 불운한 종족을 말한다. 일단 긴 근무시간이 제일 문제이며 두 번째로는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니고 일해도 일하는 것이 아니다. 3D업종 중 하나로 청소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직업으로 꼽힌다.

그런데 가만 보니 '고삼' 단어풀이 아래에 <참> 시편 "고3의 사랑 노래"라 적혀 있다. <참>은 '~ 을 참고하시오'라는 뜻이란다. 해서, 시편으로 들어가 동 제목의 시를 찾아 얼른 일별하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다. 감동의 무게를 감안하여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고3의 사랑 노래

원작 신경림

고3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공부가 끝나 돌아오는
가로등 밝힌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고3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성적표 오는 소리 매미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고3이라고 해서 재미를 버렸겠는가
컴퓨터 하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복합 상영관에 한 관 남았을
보고싶던 영화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고3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고3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한참 웃다 말고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났다. 너무 심하게 웃어서 나온 눈물인지 다른 무엇이 개입이 되었는지는 옥석을 가려봐야 알겠지만, 원작시를 패러디한 필자의 솜씨에 탄복하여 박수를 치다가도 이게 그냥 웃고 박수치고 넘어갈 일인가 하고 잠깐 동안 정신의 혼란상태를 겪기도 했다.

2005년 1월 15일 인터넷에 공개되어 한 달 만에 무려 30여만 명이 접속하는 놀라운 대기록을 세운 '학교대사전'은 명색이 사전인데도 그 재미가 소설보다 승하다. 거기에 학생다운,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위트와 풍자, 반전과 역설로 점철되어 포복절도할 웃음 끝에 한 순간 정신이 확 들기도 한다.

언어의 비틀기와 비꼼의 대상이 '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예들을 'ㄷ'에서 찾아보자.

*단정한- 교칙과 관습법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한.

*단체생활- 그들과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맞아야 하는 생활.

*단소- 대나무 재질로 된 피리. 원래는 대나무 재질이어야 하지만 플라스틱 재질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재질이든 간에 모양과 크기가 매우 몽둥이로 적합하여 악기로 쓰지도 않으면서 손에 쥐고 다니는 선생을 볼 수 있다.

*담임- 월급 조금 더 받고 마흔 명의 아이들을 인솔해야 하는 불쌍한 존재. 까닭에 괜히 종례를 길게 끌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학교대사전'의 필자는 올해 2월에 졸업한 고3생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필자의 정보력이 참 대단하다. 담임교사들이 10만원을 조금 웃도는 담임 수당을 받고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까짓 담임 수당 안 받고 담임 않겠다고 말하는 교사도 물론 있겠지만, 담임 수당이 오르고 난 뒤에 담임 기피현상이 조금은 누그러진 사실도 필자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그 정도로 넘어가 준 것이 고맙다. 담임교사가 학생들에게 폭군이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그려진 것도 필자의 아량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하긴, 교사나 학생이나 입시위주 교육의 피해자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영리한 필자가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좀 생뚱맞은 얘기 같지만 나는 십수 년 전에 술을 끊은 적이 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경험한 어떤 기이한 느낌이 발단이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아들이 그의 세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들은 바야흐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었고, 나는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교대사전'을 일독하고 난 뒤에 나에게 온 첫 신호는 내가 객체, 혹은 대상이 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선 속에 포착된 부자유한 나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고 기분이 우울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뻤다. 아들이 제 나름대로의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섬뜩하면서도 부모를 추월하여 삶과 사랑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듯이 말이다.

다만, 아들의 눈빛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방어보다는 변화가 필요했듯이 아이들의 거북한 눈길 속에서도 나는 활활 자유롭고 싶었다. 방어보다는 변화를 통해서.

'학교대사전'은 일러두기를 통해 다음 세 가지를 먼저 당부, 혹은 설명하고 있다.

*이 사전은 반드시 유머감각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이 사전은 객관적이지 않다.
*설명의 간결성을 위해 일일이 설명을 다 달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학교대사전'은 얄밉도록, 아니 무섭도록 객관적이다. 이번에는 그 예를 'ㅈ'에서 찾아보자.

*자유주의-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이념. 학교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의 복장, 두발, 월담, 잡담, 도박, 흡연, 0교시 수업, 수면, 등하교 시간, 수행평가, 매점 이용, 급식, 불우이웃 성금, 수련회, 수업 과목 등 일부사항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자유를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한 바 있다.

*장학사- 학교에 간혹 방문하는 교육청의 파견요원. 이들이 다녀가는 날에는 평소 쓰지 않던 뒷칠판에 학습목표란이 생기기도 하며, 급식이 유난히도 맛있어진다.


얼마나 객관적인가. 좀더 무서운(?) 예를 들어보자. '학교대사전'은 '전교조'를 이렇게 말한다.

교육혁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알려진 단체. 일부 열성 전교조원은 학교 밖으로 나가서 수업을 빠뜨리기도 한다.

설명은 이것으로 끝이다. 더 있다면, 참교육 로그와 함께 창립선언문 전문을 인용했을 뿐이다. 허망했다. 아니, 억울했다. 전교조에 대해서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이라니? '교육혁명에 깊이 관여한'보다는 '교육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한'으로 표현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컸다.

'일부 열성 전교조원은…'의 대목에서는 섭섭하다 못해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다. 전교조가 교육환경개선을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야박한 말을 하다니!

그런 생각 끝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 왔다. 뒤늦게야 이런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관적인 생각이 아닌가! 나는 못났게도 얼굴에 묻은 검불을 뗄 생각은 하지 않고 정직한 거울만 탓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70년대 초에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때 이런 사전이 나왔다고 해도 내용이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학교는 35년 동안 성장을 멈추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인가. 물론 외형적으로는 달라진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학급당 학생수도 거의 절반가량 줄었고 교실마다 값비싼 최첨단 장비들이 즐비하다. 물론 장학사가 방문하는 날에만 빛을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변하지 않은 걸까? 'ㅎ'에서 찾아보았다.

*하품- 교장의 훈화나 졸린 수업을 들으면 일어나는 신체의 반사반응.

*학교의 명예- 학교가 학생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추상적인 개념.

*학생부장- 교내의 두발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고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선생. 학생부장이 대머리일 경우 그 학교의 두발규정은 더욱 철저하다고 알려져 있다.

*학생회-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학교에서 세운 어용단체. 학생회의 지키지 못할 약속들: 1. 두발자유화를 하겠다. 2. 급식을 개선하겠다. 3. 학생회를 적극 운영하겠다. 4. 매점을 더욱 업그레이드하겠다. 5. (남학교의 경우) 여학교와 교류를 증대하겠다.


사오년 전만해도 '학교붕괴'란 단어가 유행어처럼 인구에 회자 된 적이 있었다. 물론 학교붕괴의 주역들은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학교대사전'에는 학교붕괴라는 단어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이 이 사전의 한계라면 한계다. 가해자로서의 자신의 역은 철저히 모르쇠다. 하지만 학교붕괴가 어찌 아이들만의 작품이겠는가? 참다운 자유를 모르는 아이들은 방종하게 되어 있는 것을.

글을 마치려니 조금은 계면쩍다. 필자는 '학교대사전'을 유머감각을 가지고 읽으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참 즐겁다.

학교라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자폐'보다는 '풍자'를 선택함으로써 생산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해준 '학교대사전' 필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나를 변화시킬 일만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교육전문월간지 <우리교육>에도 기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교육전문월간지 <우리교육>에도 기고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