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이 둘 있네. 어느 것부터 들을 텐가?"
홍윤서는 권기범의 추측에 긍정도 부정도 거북스러운 듯 다른 말을 꺼냈다.
"말머리 돌리지 말게, 이 사람아."
"아직은 나도 말하고 싶지 않네. 어쩌면 말할 내용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저 모른 척 해 주게. 설마하니 내가.......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홍윤서는 말을 맺는 듯 하는 듯 얼버무렸다. 이런 홍윤서의 속을 아는 권기범이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까 말한 기쁜 소식이란 게 뭔데 그러나?"
"......"
"그런 질문이 어딨나? 둘 다 기쁜 소식인데 어느 것부터 듣겠느냐니?"
"그래 말을 잘못 했군. 하나는 사람에 관한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기기(機器)에 관한 소식일세. 어느 것부터 듣기를 원하나?"
그제서야 홍윤서도 평상을 찾고 응답했다.
"혹?..... 연이를 찾았는가!"
권기범의 얼굴이 화들짝 밝아지며 소리쳤다.
"아, 아닐세....."
홍윤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군. 자네도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구먼 그래. 벌써 7년이네..... 이젠 잊게."
"연이가 아니라면 사람에 관한 기쁜 소식이란 뭐가 있겠는..... 혹시? 동이?"
"그렇다네. 마두산에서 그 사단이 나고 열흘이 넘어서야 동이가 복귀했다네."
"그 녀석 다친 덴 없던가?"
"기력이 쇠하긴 했어도 상한 곳은 없었네. 관의 추적을 피해 용문산으로 돌아 묘향산 인근까지 스며들었더군. 이산(耳山)에 만들어 둔 숯막으로 찾아들어 무사히 귀대하긴 했네."
권기범의 얼굴이 펴졌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흑호대 숙영지에서 쉬고 있네. 그 녀석 지금 영내에서 최고의 영웅이 되었어."
"당장 얼굴을 봐야겠네."
"허, 참. 사람 성격 급하긴. 하룻밤만 참게. 그러잖아도 내일 오혈포(五穴砲)와 산총(散銃)의 시연식에 시범 발사자로 나올 걸세."
"뭣이라? 오혈포와 산총이 나왔는가?"
"하하. 뜸을 들인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만 토설을 해 버렸네. 그렇다네 두번째 기쁜 소식이란 게 바로 오혈포와 산총의 개발 소식이었네."
"애썼구먼. 자네나 군기소(軍機所) 사람들이나 다 애썼네."
"나야, 뭐. 다 군기소 박 서방 덕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들'의 덕이 컸고."
"그래 그래 그렇고 말고. 그래도 박 서방이나 '그들'이나 다 윤서 자네의 공이 아니겠나."
"나야, 뭘. 그런데 자네도 어지간하이. 자네 같은 무공의 소유자가 그토록 총포에 집착할 줄은 몰랐네. 기술자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국 유학에 참여 시킨 건 내 생각이었지만 귀국해서 이런 결과물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건 총포에 대한 자네의 의지 덕분이라 할 수 있지."
"앞으로의 세상은 총포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걸세. 앞으로랄 것도 없지. 서세동점의 지금 현실도 실은 총포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잖는가. 난 권법과 칼을 수련하는 데 겨우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시작해 20여년 이상의 세월을 꼬박 바쳤네. 이 미천한 경지를 실력이라 평할 수 있다면, 이 만큼의 수준에 오르는 데 20년을 온전히 바친 셈이지.
허나 동이를 보게. 이제 겨우 2년이야. 더 엄격히 말하면 우리의 신형 총포를 쥔 지는 겨우 몇 달이네. 그런 동이에게 저 총포 한자루만 쥐어 주면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수십의 군졸을 단 한사람이 묶어 놓는 일은 나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네."
"그래도 경신년의 난 때는 자네 혼자 수십인을 막지 않았는가?"
홍윤서는 7년 전 연무원에서 관군을 막아내던 기범의 모습을 선명히 떠올리며 말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막은 건 아니지.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잠시 지연은 시켰지. 그것도 여러 사람들과 같이. 결국은 동료들 모두가 죽거나 상하고 나 또한 사로 잡혀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하지 않았나. 그러나 동이는 멀쩡히 살아왔네. 굳이 동이가 아니라, 두메의 초동(樵童)이라 하더라도 단 이틀만 이 총포의 조작법을 가르친다면 그 앞에서 내 무예와 용력이란 것이 한낱 과녁에 불과할 따름이지.
안주 근처의 주막에서 죽은 자가 곽 포교라 하였던가? 평안 감영 내에선 한 무예하기로 소문이 짜르르한 자라면서? 그러나 어찌 되었나? 그 조그만 납덩어리 한 알에 식은 방귀를 뀌지 않았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네. 공맹(孔孟)의 도와 천리(天理)만으로 지탱하기엔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어. 벌써 중국과 일본에서 그 사실을 입증하였듯이 물질 문명과 과학 기술을 내세운 양이에게 온 세상이 지배될 걸세. 조선도 예외일 수 없네. 그 전에 우리 손으로 조선을 바꾸어야 하네. 우선 당장은 그 총포의 힘이 절실할 걸세."
"그래, 자네의 혜안에 동감하네. 이번 마두산 사건으로 몇 가지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는 되었지만 개화군의 사기는 몇 배 충천해 있네. 병의 수효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걸 여실히 입증한 사건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아까 회의석상에선 언급을 안 했네만 이번 평양 유기전 식솔의 호송 중에 벌어진 마두산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근신조치는 무효화 시키겠네. 그들이 관에 노출된 건 실수라 하나 워낙 사안이 중대했고, 또 노출되어서도 우리 군의 우수함을 여실히 입증하여 사기를 진작한 공 또한 크지 아니한가? 오히려 상급(賞給)을 내려야 할 것일세."
"글쎄...... 그건......"
홍윤서는 아직 머뭇거리는 말투였다.
"원로들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좋지 않아."
"그야, 자네 뜻대로 하게. 영수는 자네이지 않는가."
"그래. 동이의 귀환도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네. 그리고 기기의 개발도 중요하나 그 개발된 기기를 다루는 사람의 기술이 중요함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고. 해서 동이를 주축으로 한 저격병 부대를 따로이 양성했으면 하네."
"그도 그럴 듯 하이. 병무영장과 논의하여 즉시 시행토록 하지."
"고맙네. 그리고 마포 여각에서 수발한 가죽 일속은 오는 길에 박천(博川)의 갖바치에게 부려놨네. 내달까지 300여 개의 탄약통과 군장이 납품될 걸세."
"자네도 원로(遠路)에 애썼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시연을 기대하시게"
"어릴 적 이래 자네와 간만에 별 아래 서는 게 얼마만인가."
둘은 대화가 끝나고도 늦도록 바위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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