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할아버지의 말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92) 어린시절의 추억

등록 2005.03.12 08:57수정 2005.03.1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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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도 충전을 해야


저녁놀에 물든 내 고향 구미 금오산,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불상'이라는 별칭도 얻고 있다
저녁놀에 물든 내 고향 구미 금오산,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불상'이라는 별칭도 얻고 있다구미시
‘박도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를 클릭해 보면 이 기사가 490번째로 기록될 것이며, 기자회원방의 등록기사에는 꼭 500번째로 등록될 것이다.

내가 기자로 등록한 지 2년 8개월이 됐다. 나는 970일 동안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가사를 송고한 셈이다.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사를 쓴 분도 많겠지만 <오마이뉴스> 기자회원 가운데 필자도 기사를 많이 쓴 축에 낄 것 같다.

나는 요즘 거의 하루 종일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까 아마도 하늘이 나에게 조금 쉬라고 ‘휴식’이란 벌을 준 것 같다(나는 지난해 두 권의 책을 냈고, 올해는 세 권의 책을 펴낼 예정이다).

통원 치료와 식수 문제로 안흥을 떠나 서울에서 지내면서 그동안 연재를 이어왔는데 당분간 연재도 조금 쉬어야겠다. 서울에서 지내면서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를 쓰자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다.

손전화도 충전을 해야 계속 쓸 수 있다. 사람의 머리도 가끔은 쉬면서 빈 머리를 채워야 계속 건강할 것이다. 그저께 안흥 집에 갔다가 글방에 들러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집어왔는데 많은 책 가운데 <논어>였다. 왜 하필 논어였을까?


그것은 무의식중에 할아버지의 음성이 그리웠나 보다. 나는 어린 시절 아침밥을 먹고 나면 사랑으로 건너가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서 강독을 받았다. “자왈(子曰)…”의 ‘자왈’이 뭔지도 모르면서 곰팡내 나는 고서를 할아버지의 선창에 따라 앵무새처럼 읽고 외던 일이 그 얼마나 지겨웠던가!

“자왈(子曰), 군자는 식무구포요, 거무구안이라(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자왈, 군자는 식무구포요, 거무구안이라.”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느니라. ….”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느니라. ….”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박도

늘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으셨던 할아버지

옛 것은 천덕꾸러기로 밀려나고 미군과 함께 밀려온 양풍이 범람하던 그 즈음에도 할아버지는 늘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으시고 나들이 하실 때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셨다. 저녁 진지를 잡수시고 마당에 나가서 남쪽 하늘에 우뚝 솟은 금오산을 바라보시며 일기예보를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집안의 버팀목이었던 할아버지가 쓰러지시자 3년 만에 기왓장까지 깨져버렸다. 할아버지가 남긴 그 많던 전답도 고서도 하나 없다. 다만 남은 것은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 음성뿐이다.

그런데 어린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고서 강독이 너무 싫었다. “헬로 기브 미 초콜릿”이 판치는 세상에,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매우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구닥다리를 배워서 어디다가 써 먹는다는 말인가.

어느 새 내 나이가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고서를 강독하시던 춘추(연세)보다 더 먹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지겨워했던 할아버지 말씀이 새록새록 그리워지고, 케케묵어 보이던 공자의 말씀 <논어>가 천박함과 경망함으로 뒤덮인 오늘의 세상을 평정시킬 수 있는 잠언으로 여겨진다.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금오산 들머리의 채미정, 이 어른이 후학을 기른 탓으로 이 고장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나왔다.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김응기, 정붕, 박영, 김진종…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금오산 들머리의 채미정, 이 어른이 후학을 기른 탓으로 이 고장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나왔다.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김응기, 정붕, 박영, 김진종…박도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자왈,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는 화합하나 뇌동(雷同, 자기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붙좇아 함께 어울림)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자왈, 묘이불수자 유의부, 수이부실자 유의부).

공자가 말씀하셨다.“싹이 자라나서도 이삭은 솟지 않는 것이 있고, 이삭은 솟아나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子曰, 飯疏食 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자왈, 반소사 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공자가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삼고 있어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도 부귀해지는 것은 내게는 뜬 구름과 같다.”

오늘 아침 <논어>의 수백 마디 말씀 가운데 세 말씀만 골라 이 글에 소개한다.

첫째 말씀은 아무런 줏대도 없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의 말에 춤추는 경박한 무리에 대한 경계요, 둘째는 불행한 운명에 괴로워하는 이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요, 셋째는 가난한 가운데도 즐거움이 있다는 안빈낙도의 청빈한 생활철학의 말씀으로 지식인들에게 들려주는 금언으로 새길 말씀이다.

이 글을 읽고 많은 독자가 공감하면서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면 오늘 아침 내 수고의 보람이리라.

구미시가지를 말없이 굽어보는 금오산
구미시가지를 말없이 굽어보는 금오산박도

덧붙이는 글 |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조금 쉰 뒤에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조금 쉰 뒤에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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