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 중에 가장 큰 복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93) 이발소에서

등록 2005.03.22 11:48수정 2005.03.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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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는 동네 인생복덕방 주인


a 안흥면 종합복지회관

안흥면 종합복지회관 ⓒ 박도

늘 나돌아 다니던 사람이 한 달째 집안에서만 맴돌고 있으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깁스를 하고 있으니 가장 괴로운 것은 목욕탕에 갈 수 없는 점이다.

장날에만(닷새 만에) 문을 여는 안흥면 종합복지회관 목욕탕과 우천면 오원리에 있는 치악산 코레스코 지하 목욕탕을 번갈아가면서 늘 찾던 사람이 한 달이나 얼굴만 닦고 있으니 온 몸이 근질근질하다.

거기다가 이발조차 못하여 머리조차 근질거려서 더 견딜 수 없어 좀더 참았다가 다리의 깁스를 풀고서 하라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목다리를 짚고 동네 이발소를 찾았다. 동네 이발소를 찾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 일요일 오전 때때로 아들을 데리고 이발소를 찾았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서는 저 혼자 해결하기에 이발소 출입이 뜸했다.

사실은 그보다 그 언제부터인지 이발소들이 조금 이상해지고서는 한 번도 출입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미장원을 다녔다. 값도 싸고 5분 정도면 이발이 끝났다. 그러다가 적선동 현대빌딩 지하 목욕탕을 단골로 다닌 뒤로는 그곳 간이 이발소를 10여 년 이상 이용했다. 거기서도 길어야 10분이면 이발이 끝났다. 안흥으로 간 뒤로는 목욕탕에 간이 이발소가 없어서 장터 스마일이발소를 단골로 드나들고 있다.

사람들이 이발소를 찾는 것은 머리를 자르고 손질하기 위해서지만, 또 한 편으로는 피로를 풀거나 이발사의 구수한 얘기를 듣기 위해서다. 이발사가 덥수룩한 머리를 가위질하면서 들려주는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는 더 없이 정겹다. 특히 시골 이발사는 동네 인생복덕방 주인으로 모르는 사람도, 모르는 일도 없었다.


이발사의 구수한 이야기와 재각거리는 가윗소리에 설핏 풋잠을 자고 나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다. 조발이 끝나면 조수(주로 소년)가 머리를 감겨주는데 비누칠 한번 하고서 벅벅 문지를 때의 그 시원함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날아갈 듯 상쾌하다.

a 선암사 뜰에 활짝 핀 수양벚나무

선암사 뜰에 활짝 핀 수양벚나무 ⓒ 박도

다행히 구기동 동네 이발소는 옛날 분위기 그대로라서 좋았다. 워낙 오랜만에 찾은 탓인지 서로 몰라보았다.


이발이 시작되자 이발사는 내 발 다친 얘기를 꺼내면서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잠시 후 한 손님이 들어오자 그는 단골인 양, 그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식물인간의 생명 연장 논란

그는 간밤에 친구 아버지 빈소에서 날을 새우고 피로를 풀고자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말을 기회로 자연스럽게 '죽음'이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고인은 그저께 밤에 편히 잠들었는데 부인이 새벽녘에 흔들어보니 그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잠자듯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다.

그러자 이발사도 나도 고인은 오복 중에 가장 큰 복을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며 부러워했다. 유언 한 마디 없는 게 아쉽다고 다른 손님 한 분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이발사는 평소 하던 말이 유언이지 뭐 별다른 게 있었겠냐고, 아무튼 편히 눈을 감은 것에 그것은 '옥의 티'도 아니라고 했다.

'오복(五福)'이란 첫째 장수를 원하는 수(壽), 둘째 부유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富), 셋째 일생동안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강녕(康寧), 넷째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자는 유호덕(攸好德), 다섯째 모든 소망과 봉사를 이룬 뒤 자기 집에서 일생을 편안히 마치기를 바라는 고종명(考終命)이다. - <서경> 홍범편

오복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풀이가 다르겠지만 삶을 마감하는 죽음의 복만은 나도 꼭 그 속에 넣고 싶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동서고금이 없나 보다.

간밤 뉴스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 사는 테리 시아보라는 한 부인이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목숨을 이어왔는데 지켜보던 남편이 지친 나머지 주 법원에 안락사를 허용하라고 소송을 냈고 법원은 영양분을 공급하는 튜브 제거를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그러자 그동안 튜브 제거를 원했던 남편 마이클과 이를 반대했던 테리 시아보 친부모 사이에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미 연방법원과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생명을 연장케 하는 등 이 문제가 온 미국을 들끓게 하는 모양이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람 있게 사느냐

이런 일은 결코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생활수준 향상과 의술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계속 경제 활동을 하면 그리 큰 문제가 없겠으나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 언저리에도 한 분이 7년 동안 고칠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끝내 돌아가셨다. 그동안 본인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의 수발과 경제적 손실은 엄청 컸다.

a 선암사 어귀에 핀 동백꽃

선암사 어귀에 핀 동백꽃 ⓒ 박도

내가 아는 한 분은 인삼이나 녹용 같은 보약은 드시지 않는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런 보약을 많이 먹으면 죽을 병이 들어도 잘 죽지 않아서 오히려 자식들 고생시키고 본인도 더 큰 욕을 본다는 것이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여 사람의 죽음을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점차 이 사회가 노령화되어가는 추세라 적이 걱정이 된다.

이발사는 가위질을 하면서 옛날의 '고려장'도 산 사람이 살기 위해 그런 제도가 나왔을 거라며 요즘 일부에서는 멀쩡한 부모도 버리는 신판 고려장이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면도도 하고 머리도 감고 화장까지 하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큼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친구를 불러서 차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전직 삼성장군도, 총장도, 교장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다 똑같다면서 더 중요한 것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람 있게 사느냐에 달렸다고 결론을 내고는 헤어졌다.

어서 빨리 깁스를 풀고 뜨거운 물로 사워를 하고 바닥까지 투명한 맑은 온탕에다 내 몸뚱이를 푹 담그고 싶다. 이게 지금의 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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