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라일락꽃 그늘 아래- 40회(7부:타는 목마름으로)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3.18 22:19수정 2005.03.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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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 화백 제공
김인기 화백 제공
“바로 박정희 아닙니까? 박정희는 사실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독립군을 탄압하던 그런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쿠테타를 일으켜 놓고 민심만 수습되면 바로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던 그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역시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10·26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정말 이 땅에 민주화의 봄이 오나 했는데, 이번에는 대머리 아저씨가 역시 총칼을 들고 나왔습니다. 80년 오월, 죄 없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무참하게 학살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무고한 우리 국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아닌 살인자가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러니 서방 기자들이 '한국에서 민주화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하루라도 속히 자기들의 잘못을 국민 앞에, 역사 앞에 백배 사죄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 길만이 그들이 살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물러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정권퇴진운동도 불사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세대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주, 민주, 통일'이 그것입니다. 우리 세대에 이 세 가지 과제를 이룩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후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독재와의 투쟁을 우리 시대에 끝내야 되기 않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이 신성한 캠퍼스를 최루탄과 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만들겠습니까? 우리가 대동단결, 총력 투쟁하여 우리 세대에 끝장을 냅시다. 그리하여 우리 후배들과 자녀들에게는 학 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캠퍼스를 물려줍시다.


듣자니 우리 학교는 학교 버스가 참으로 많습니다.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박통 때 학교가 너무 조용해서, 다시 말해 데모를 하지 않아 청와대에서 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니까? 그래서 당시 서울의 모 여대에서 가위를 한 자루 총학생회 앞으로 소포로 보내왔답니다.

웬 줄 아십니까? 남자들의 거시기를 모두 자르라고요. 앉아서 오줌을 누는 여자들도 분연히 일어나 독재에 항거하는데 하물며 서서 오줌을 주는 사내대장부들이 있는 대학에서 침묵하고 있다면 남자로서의 자격이 없으니 스스로 잘라버리라며 가위를 보내왔답니다. 여러분!


더 많은 학교 버스를 모교에 남겨주고 싶습니까? 아니지요. 또 다시 한번 가위를 소포로 받는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 싶으십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해답은 하나입니다. 일치 단 결하여 우리의 목표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장 연설에 학생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어느새

"독재정권 물러가라 울렁울렁~, 전두환은 물러가라 울렁울렁~"

이러한 가락 있는 구호로 분위기를 한데 모으더니, '늙은 군인의 노래'가 아닌 '젊은 투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투사가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 은 자랑스런 투사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만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투사 아들 너로다

학생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자 학과장과 어용교수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조교수는 나에게로 달려들듯이 와서, 나의 주장이 궤변 일색으로 선량한 학생들을 선동하는 것이라며 당장 발언을 최소하고 수업복귀를 종용하라고 교수라는 권위로 찍어 누르려고 하였다. 교수들이 좀처럼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일침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들, 그렇게 그 자리가 좋으세요. 왜 우리가 시위를 계속하면 보직교수 자리에서 잘리기라도 하나요? 아니면 반대로 우리학과가 가장 먼저 수업에 복귀하면 다음 번 학장자리는 따 놓은 당상인가요? 교수님들 그러지 마시고 제발 저희들과 동참하시지요. 그것이 어렵다면 몇몇 대학교수들처럼 시국선언문이 라도 발표해 보시든지?"

그러자 조교수는 이를 박박 갈며 슬며시 꼬리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내가 괘씸했던지 다음 번 강의의 '고대소설론' 과목에서 내 학점을 세상에 C+를 주었다. 늘 A+ 아니면 Aㅇ를 받던 내가 C+라니 말도 되지 않아, 어떻게 감정으로 학점을 줄 수 있느냐며 따져 물었더니 그 분의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학점 처리는 교수의 고유 권한이야. 이의 있으면 고소를 하든 고발을 하든 마음대로 해봐."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 분이 너무너무 측은해 보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 신을 깨우쳐 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시위의 불길은 점점 타오르고 있었다. 한번은 '독재 타도! 파쇼 타도!'를 외치며 교문 앞 도로까지 진출하여 제법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시위대와 진압경찰들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더 나아가려 하면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고, 반대로 경찰이 진압 차 앞으로 나아오면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학생들의 돌과 화염병에 맞아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되는 전경이 속출했고, 경찰이 쏜 최루탄에 부상당한 학생들도 여기저기에서 나뒹굴었다. 참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벌써 몇 시간째 그러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도 앞쪽에 서서 시위를 했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시작된 집회와 시위가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게 되면서 집단심리라는 것이 작용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비교적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한 학생이 경찰에 맞아 쓰러진다던가, 최루탄 공격으로 인해 피를 흘리는 일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이성이 마비된 채,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돌변하여 죽고 죽이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경찰 쪽도 마찬가지였다. 돌이나 화염병에 맞아 전경 하나가 부상을 당하면 그때부터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포격을 해대는 것이었다. 누가 그랬는가? 군중심리에 동요되기 시작하면 모두 아이큐가 60밑으로 떨어진다고.

그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독재정치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집회와 시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학생과 경찰 사이에 치고받고 싸우는 골목전쟁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싸움으로 비화되어 한창 뜨거운 소모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나는 형을 보았다. 분명 형이었다. 화염병이 날아와 머리 쪽에 불이 붙자 형은 얼른 방독면을 벗어들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의 형은 재수 끝에 대학에 진학하였다. 집회와 시위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는데, 하필이면 전경으로 차출되었다.

형은 몇 번이나 탈영을 생각하고 계획했단다. 그러나 시골에 계신 부모님 때문에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그런 형이 오늘 내 앞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는 경찰 신분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동생은 형을 향해 돌을 던지고 형은 동생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고 있으니‥‥‥.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1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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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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