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홉시 뉴스는 봐야죠"

텔레비전에서 아이들 떼놓기 대작전

등록 2005.03.14 12:15수정 2005.03.1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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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집에서는 텔레비전 보는 날이 돌아오면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우리집에서는 텔레비전 보는 날이 돌아오면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 송성영

우리 집에서는 텔레비전 볼 때마다 안테나를 매달아 놓은 장대를 이리저리 돌려댑니다. 채널마다 수신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방 안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잘 나오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잘 나와?"
"아니, 아직..."
"잘 나오냐!"
"아니. 아, 아 됐어!"
"이제 잘 나오는겨?"
"응. 잘 나와!"

우리 식구는 지난 겨울부터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고 있습니다. 시청료 내기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

아이들은 주로 어떤 문제를 풀어 나가는 몇몇 오락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아내는 유일하게 주말연속극 <토지>를, 나는 어쩌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정도를 시청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대표 축구 경기만큼은 요일이나 시간대와는 상관 없이 시청하고 있습니다.

티브이와의 거리 두기, 그 낯섦

우리 가족이 텔레비전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골에 이사 와 한동안 화면이 잘 나오지 않는 공중파 방송을 시청하다가 2년쯤 지나 결국 유선방송을 달았습니다.


그후로 별의 별 채널이 다 있는 유선 방송을 한 1년쯤 시청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나는 방송 원고를 쓴다는 핑계로 아이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선방송을 시청하던 시기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선택하는 채널은 주로 만화영화나 오락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주변에 친구 하나 없는 촌놈들에게 큰 위안처럼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게 되는 방송물들은 그 질이 형편없었습니다.


정의를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거나 물질만능주의를 기반으로 꿈을 키워나가는 만화영화들이 판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를 즐겨 보고 있는 내가 아이들에게 보지 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보는 영화는 아이들의 만화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저질이었습니다.

요즘 유선 방송에서 내보내는 영화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열 편 중에 어쩌다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속이 뒤틀릴 정도로 역겨운 할리우드식 저질 영화거나 무지막지한 폭력단들이 '정의의 사자'로 둔갑하는 그야말로 '미국식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론이 빤한 폭력물들, 백인과 흑인이 반드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영화, 동양인들, 특히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이 악역으로 등장하는'백악관 홍보용 영화들', 그렇지 않으면 뭔가 한방으로 사람 팔자를 바꿔 놓는 '자본주의 만만세 영화들', 로또 복권식 사랑 얘기로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느낌 없는 영화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혹시나 싶어 보다 보면 역시나 그런 영화들 일색이었습니다. 비판 의식을 갖고 본다며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저질 영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비판 의식으로 무장하고 본다하지만 재미없으면 볼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저질 영화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그걸 보도록 강요했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제 해결은 아주 쉬웠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돌려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나는 시청한 지 1년쯤 된 유선방송을 과감하게 끊었습니다. 아내는 본래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큰 동의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함께 티브이 보며 초치기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일방적인 통고를 했을 뿐 동의를 얻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강압적인 실력 행사'에 힘들어 했습니다. 한동안 금단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심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유선방송이 달려 있는 집에 가면 두 녀석 모두 만화영화 채널 앞에 습관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 만화영화에 버금가는 재미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손 족구'를 개발했고(마당 한가운데 의자 몇 개를 네트처럼 가로질러 놓고 가벼운 공으로 족구의 룰을 적용해 손으로 하는 놀이) 나무를 다듬어 목검과 활을 만들어 함께 칼싸움도 하고 활쏘기도 했습니다. 사방치기며 비석치기 등 어렸을 때의 놀이들을 동원했습니다.

아이들은 쉽게 자극적인 만화 영화에 빠져들었듯이 새로운 놀이에 적응했습니다. 아빠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유선방송의 만화영화 채널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와 함께 한동안 공중파 방송의 어린이 드라마나 만화영화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물론 오락 프로그램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지요.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영상물 역시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아이들 정서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습니다. 창의력도 지혜도 얻을 수 없을 뿐더러 지식조차도 얻을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겠다고 갖은 방법으로 웃기고 있지만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으로 아이들의 넋을 빼앗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영상물들로부터 아이들을 떼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아예 텔레비전을 없앨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고 반발심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서서히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텔레비전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법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좀 '치사한 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집 촌놈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 싶은 프로그램에 대해 무조건 보지 말라 강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이들과 함께 시청을 합니다. 몇 날 며칠을 함께 시청합니다. 나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보면서 한두 마디 툭툭 던집니다.

"야, 참 재미없다. 저게 뭐냐, 그림도 형편없고, 어휴, 재미없어. 유치하고 어이가 없다, 맨 두드려 부수고 죽이고..."

맨 정신으로 볼 수 없을만치 저질의 영상물은 무작정 보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함께 시청하면서 재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텔레비전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악당이라고 함부로 죽여도 되는겨? 보물 찾겠다고 원주민들을 다 죽여도 되는겨? 니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순 엉터리지? 정말 유치하고 재미없지, 야, 재미없다..."

계속 재미없거나 유치하다는 식으로 옆에서 시끄럽게 굴면 아이들은 점점 그 영상물에 흥미를 잃게 됩니다. 우리 부부가 흥미 있게 보는 영상물에는 쉽게 빨려 들곤 합니다. 그것이 성인물이든 어린이물이든 상관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부가 어떤 영상물에 흥미 없어 하면 덩달아 흥미를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뭔가를 재미있게 보는데 옆에서 "더럽게 재미없다"는 식으로 염장을 질러대면 덩달아 흥미를 잃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저질 영상물에 대한 나의 집요한 '흥미 상실감 작전'에 말려들어 우리 집 아이들의 텔레비전 시청률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출연자들끼리 웃고 떠드는, 개갈 안 나는 오락물이나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폭력물에서 휴먼 다큐멘터리와 같은 볼만한 교양 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니들도 재미없지? 우리 딴 데 보자, 동물의 왕국을 보니까 재미있는 동물들이 엄청 많이 나오더라, 늑대들이 한 가족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고, 신기한 동물들 많이 나오는디, 니들 그거 봤냐, 도마뱀이 마악 뛰어가는 거, 그거 정말 웃기잖어..."

텔레비전에서 아이들을 떼어 놓는 또 하나의 방법, 아이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텔레비전을 놓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잠자고 노는 방이 아닌 아이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방에 텔레비전을 놓았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그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려면 특히 겨울철에는 따로 난로를 갖다 놓거나 보일러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텔레비전 앞에 쉽게 다가가지 않게 됩니다. 엄마 아빠와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정신 사납게 텔레비전을 보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 놀거나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뱃속 편하고 재미있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티브이 대신 칼쌈과 활쏘기에 사로잡힌 아이들

텔레비전에서 아이들 떼놓기 대작전을 벌이지, 5년쯤 지난 요즘 우리집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이나 뒷밭, 뒷산에 올라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야말로 시시껄렁한 칼쌈, 활쏘기, 공차기 놀이에 빠져 지냅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와 함께 이동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읽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텔레비전에서 멀어진 만큼 그림 그리기와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저질 영상물 대용으로 가끔씩 볼 만한 영화를 감상합니다. 한달에 한두 편 정도 보는 '가족영화' 또한 텔레비전에서 멀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저질 영상물'은 집안에서 즐기는 인스턴트 식품과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인스턴트 식품은 입맛을 자극합니다. 자극적인 만큼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질 영상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텔레비전을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제 어느 때고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고개 돌려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줄여 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비판의식이 없다는 '애'나 비판의식이 있다는 '어른'에게나 '저질 영상물'로 인한 해악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또 다시 쉽게 만나는 인스턴트식품 같은 '애욕의 드라마'들은 알게 모르게 이혼율을 높였을 것이고,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데 재미 붙인 '폭력물'들은 요즘 한창 떠들썩한 '일진회' 아이들에게 참고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식구들 역시 아주 가끔씩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있듯이 여전히 '저질 영상물'들을 알게 모르게 접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질 영상물에서 재미있는 교양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리려 애쓰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아홉시 뉴스는 봐야죠

재미있게 책을 보고 있는 우리집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니들 이제 텔레비전 별루 재미 없지?"
"아빠, 그래도 아홉시 뉴스는 봐야지, 우리 선생님이 그러셨는디 뉴스를 봐야 똑똑해질 수 있데, 아무리 그래두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지..."

세상 물정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하는 큰 아이 인효 녀석이 그럽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 녀석이 세상 돌아가는 뉴스 정도는 봐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녀석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꼬박 꼬박 봐야 한다고 말해 줘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뉴스 중에 아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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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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