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39회

등록 2005.03.15 07:46수정 2005.03.1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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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다섯 사람이 앉아있는 운봉소축(雲峰少築)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그림자가 스며들 듯 검은 인영(人影)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머리는 검은 두건을 뒤집어써 눈만 빠끔하고, 몸에 착 달라붙은 흑색의 야행복(夜行服)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체격이 왜소하고 굴곡이 선명해 여인인 것 같았다. 더구나 오직 보이는 두 눈은 흑요석처럼 빛나고 있어 여인임이 분명했다. 흑의인은 소리 없이 다가와 섭장천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직까지 찾지 못했나?”


섭장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감정도 실리지 않고, 음정의 고저도 없는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었다. 흑의인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향했다. 본래 힐문(詰問)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일을 수행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운 까닭이다.

“잠행술(潛行術)과 추적술(追跡術)의 최고라는 흑요(黑曜)가 열흘 동안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곳의 장주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군. 아무리 신병이기를 수집하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그리도 찾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는 겐가?”

섭장천의 탄식어린 말에 흑요라고 불린 흑의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상외로 어려운 곳입니다. 노야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이곳은 역리지학(易理地學)과 기관토목(機關土木)의 달인(達人)이 설계했다고 추측됩니다. 빠짐없이 훑고는 있으나 그들이 있는 곳은 아무래도 지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로 추측됩니다.”

예상대로 흑요라는 흑의인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또렷했고 맑았다. 그녀의 말에 섭장천과 훤앙한 기품의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흑모전서 균달을 바라보았다. 섭장천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일세. 우리는 찾아야 할 것이 있네.”

균달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어떠한 분부이던지 따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하지만 균달은 예전의 버릇처럼 몸을 떨지는 않았다. 친구가 죽은 그 날부터 그는 몸을 떠는 버릇을 버렸다. 그것은 그가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류(飛流)와 암와(巖蛙)는?”

공손히 부복해 있는 흑요를 향해 물은 인물은 문사건을 쓴 사내였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예리한 눈은 그 어떠한 것도 놓치지 않는 세심함이 번뜩였다. 흑요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만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험에 빠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내를 대하는 흑요의 태도는 섭장천을 대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공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흑요 자신은 그 사내가 관장하는 조직에 속해 있었고, 사내는 그녀에게 있어 하늘이었다.

“이곳의 경비 상태는?”

재차 묻는 사내의 질문에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이곳의 총 인원은 사십팔명입니다. 장주인 풍철영과 총관인 조국명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주시할만한 인물들은 없습니다.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들이 열명 정도 있지만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나머지 인원은?”

“가정(家丁, 일꾼이나 하인)이나 하녀(下女)들 뿐이고 풍철영의 아들인 풍범(馮範)이 있으나 약간 모자란 자로 보입니다. 더구나 이 운봉소축에 있었던 풍철영의 부인이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풍철영에게 딸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는데….”

“삼년전 모친이 돌아가자 집을 나가 지금은 아미파(蛾蝞派)의 제자가 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다만 출가(出家)는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곳에 들어와 있는 철혈보의 인물들 입니다. 그들 역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검산장에 대한 정보는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와 다른 것은 별반 없었다. 사실 신병이기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풍철영이 자신 만의 비밀공간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점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흑요 정도라면 충분히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빗나가고 있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과 부닥치는 일은 없어야 돼. 움직임만 조심스럽게 파악하고 그들을 섣불리 건들 필요가 없어.”

철혈보 말이 나오자 지광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미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그로 인해 과거의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다. 배반은 했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해 후회를 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 다시 돌아 올 수는 없다.

“한데 분명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분명한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섭장천이 사내를 보고 물었다. 사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십팔일전 그와 그의 친구 한명은 고평(高平)과 이곳 진성(晉城)을 잇는 관도에서 모습을 보인 바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적은 이곳을 향했고, 십오일전 행방이 이곳에서 끊겼습니다.”

그가 이끄는 조직의 추적과 정보는 언제나 정확했다. 지금 부복해 있는 흑요만 해도 지금까지 실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분명히 그들이 찾고자 하는 대상은 이 신검산장 안에 있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섭장천의 시선이 균달에게 향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자네가 좀 도와주겠나?”

“물론입니다. 노야. 찾는 대상만 알려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섭장천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균달은 매우 요긴한 재주를 가진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그를 거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균달은 이제 진정한 형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진심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친구의 복수를 해주겠다는 그의 약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댈 곳이 없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지광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찾아야 하는 자는 이곳 장주의 동생인 양의검 풍철한과 그의 친구인 참풍도(斬風刀) 가군영(珂君楹)일쎄. 자네는 그들을 본적이 있나?”

“풍철한은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풍도 가군영은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을 찾는 것은 얼굴을 몰라도 될 것이네. 아마 참풍도 가군영은 죽었을 것이고, 풍철한 역시 죽었을 가능성이 높네. 설사 죽지 않았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시신은 썩어가는 고목과 같이 적갈색으로 변해 있을 것이네. 그들의 시신이 어떻게 변해 있더라도 자네는 절대 놀라지 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었더라도 반드시 그들의 시신을 빼내 와야 한다는 것이네.”

말을 하는 섭장천의 얼굴에 언뜻 한줄기 수심이 스쳤다. 그 의미를 아는 인물은 오직 문사건을 쓴 사내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일을 어찌하랴! 그 모습을 본 지광계는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이 일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풍철영에게 밝힌 것처럼 구파일방에 몸을 의탁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의 친구인 풍철한을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섭장천의 부탁 때문이었다. 본래 그는 풍철한을 찾기는 했다. 그러다 섭장천에게 설득 당한 이후 그는 풍철한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한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섭장천은 갑작스럽게 이곳을 와야 한다고 말했고, 풍철한을 반드시 찾아봐야 한다고 했었다.

풍철한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워낙 아무 일에나 끼어드는 성격으로 그의 신변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신도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무위도 무위려니와 덤벙거리는 것 같아도 그 모든 것이 세심한 계산속에 나온 행동이란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그를 만나 사귄지 칠년이 지나서였다.

헌데 그가 죽었을 것이라니… 그리고 시체를 회수해야 한다니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그의 물음에 섭장천은 잠시 망설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그가 무슨 일인가 했네. 그 일은 우리에게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고 우리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아야 하네.”

“그가 정말 죽은 것이오? 아니 살아 있다면 죽이실 작정이시오?”

풍철한은 자신이 철혈보를 배반한 것과는 상관없이 아직 친구였다. 친구는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배반했다고 해서 그 관계가 끝나지는 않는다. 친구는 언제까지 친구이기 때문이다.

“죽었을 가능성이 많네. 하지만 죽은 시신은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신을 반드시 회수하려 하는 것이네. 만약 살아 있다면 죽이거나 데려가야 하네.”

섭장천의 단호한 말에 지광계는 실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이런 일을 하고자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했지만 이런 일인지 몰랐다.

“결국 저는 친구를 죽이려 이곳에 온 것이 되었구려.”

지광계에게 있어서 섭장천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미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도 사라진 현재 상황에서 그의 무공을 회복시켜주고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섭장천 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일에 협조했는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들을 말린다고 말려질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능력이 없었다. 자꾸 후회가 밀려들었다. 단지 자신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드는 후회는 아니었다. 친구까지 배신을 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후회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고뇌를 모를 섭장천이 아니었지만 섭장천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문사건을 쓴 사내에게 물렀다.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언제 도착할 것 같다고?”
“빠르면 이틀 뒤, 늦으면 사흘 후 정도면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까지는 가능하겠나?”

사내는 그 말에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 본다는 것은 이미 자신에 대해 믿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아마 자신을 믿었다면 섭장천의 입에서는 ‘가능하겠지?’ 라던가, ‘충분하겠지?’ 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긴장했다. 그리고 부복해 있는 흑요를 바라보았다.

“흑요. 내일 저녁까지는 반드시 찾아내라. 나머지 인원도 모두 투입하도록.”

흑요는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거의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이곳에 직접 나타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이 소축 앞에 보면 매화나무 세그루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보고할 밀마(密碼:암호)나 음호(陰號)를 남기도록 해라. 철혈보의 이목을 무시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흑요는 어떻게 알았는지 사내가 손짓을 하자 조용하게 들어 온 창문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가 벽을 기어오르는 듯 했다. 일절 소리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을 정도였다.

섭장천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그 불안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목에 가시 같은 철혈보의 거물들이 이 산장에 십여명이나 들어와 있어서? 구파일방의 거물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곳의 장주 풍철영이었다.

중원에서는 풍철영을 모른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곤 오직 풍철한의 형이고, 신검산장의 주인이라는 것뿐이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신병이기를 모으는 취미를 가졌다는 것 뿐. 하지만 만나 본 풍철영에게서 알지 못할 느낌을 받았다. 섭장천이 살아오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인물은 오직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과 버금갈 고수였다.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풍철영에 대한 기분 나쁜 느낌은 영 가시지 않고 있었다.

만약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야 했다. 죽임으로서 그 비밀은 지켜져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뒤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밀이 밝혀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결론은 한가지였다. 흑요가 빨리 찾아내는 것.

“자네도 서둘러 주겠나?”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균달은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다. 균달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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