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강제적 자율학습과 0교시 수업 부활을 반대하며

등록 2005.03.21 08:19수정 2005.03.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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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자율학습 시간,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한 아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전날 야간자율학습 문제로 집에 전화까지 걸었던 아이다. 모든 것을 옆 반 단짝 친구와 행동 통일을 하는 아이여서 그 친구에게도 거의 아부에 가까운 말로 부탁을 해두었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밝긴 했는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나는 일순 긴장을 하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든 채 아이에게 물었다.

“야자하기로 결정했구나, 그렇지?”
“아니요. 저, 안 할 거예요.”
“왜? 어제는 할 것 같던데.”
“친구랑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로 했어요.”

나는 그만 힘이 빠져 의자에 펄썩 주저앉는다. 자율학습 희망자 명단을 올리라는 말이 나온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다. 희망자 조사 같은 것은 얼렁뚱땅 형식적으로 해놓고 성적순으로 몇 명 뽑아 명단을 올리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의 일처리가 담임인 내 처지를 잠시 부드럽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학생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우선 학생들의 건강문제 때문에도 그렇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척추가 온전할 리가 없다. 공부를 하더라도 깨끗이 몸을 씻고 환경을 바꾸어 음악을 듣거나 적당한 운동을 한 뒤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학과 공부만이 공부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서도 왜 힘이 빠지는 걸까? 아무래도 학교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실업계 학교라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에 대한 압박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같은 실업계인 모 학교가 시내 인문계 학교와 엇비슷한 행보를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왜 그 학교는 잘 되는데 우리는 안 되느냐는 식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울화가 치민다.

단언하건대, 지금 시내 고등학교에서 희망자 조사를 제대로 하는 학교는 우리 학교뿐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제대로 하는 학교가 마치 낙후된 학교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여기에는 교육관청의 직무유기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인지 고민하지 않는 교육철학의 부재가 우리 교육의 전망을 심히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우리 학교가 인문계가 되어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을 강제로 시행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다른 학교가 다 그렇게 하는데 학교장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없이 우울해진다. 어쩌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더욱 심사가 뒤틀리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라. 다른 학교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학생들의 희망의사와는 상관없이 보충자율학습에 돌입하는데 우리 학교는 열흘이 지나도록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한답시고 아직 반편성도 못하고 있다면 교육을 시험성적과 동일한 개념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한심한 작태로 보이겠는가.

장담할 일은 못되나, 나는 우리 학교가 인문계 학교가 된다고 해도 학생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자율학습에(자율학습을 강제로 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가?)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불법이요 비교육적인 처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사실상 나는 교사로서 교육행위를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일갈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을 위해 영어교과서에 소개되는 일련의 사건을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흑인 여성인 로자 팍스(Rosa Parks)다. 사람들은 그녀는 '민권 운동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저녁이었다. 로자는 일터를 떠나 집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에 올라 백인 칸 바로 뒤 흑인 지정석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몇 정류장이 지나자 자리가 꽉 찼다. 백인 한 명이 타자 운전사는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갑자기 그녀는 자리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싫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는 게 좋을 거요. 아니면 경찰을 부르겠소"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사는 버스에서 내려서 경찰관 두 명과 함께 돌아왔다. "당신을 체포하겠소." 그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결국 감옥에 수감된 그녀는 다행히도 100달러의 보석금을 내준 친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 흑인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회합을 통해 버스회사가 자신들을 정중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면 버스를 타지 않고 걷을 것을 결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판사는 그녀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그녀는 사건을 상급법원으로 가져가기로 결정했고, 다음 해 11월 대법원으로부터 대중교통수단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 수업 범위였다. 우리는 로자 팍스에 대한 존경과 성원의 뜻을 담은 뜨거운 박수로 수업을 끝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섭섭하여 학생들에게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No! 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요? 만약 이 흑인 여성이 No!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의 당당한 거부의사가 없었다면 흑인에 대한 부당한 인권침탈과 차별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요? 양식 있는 백인들이 알아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주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No!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용기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만약 이런 질문을 고등학교에서 사회나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던졌다면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엄두가 나기나 할까?

영어과목은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기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로자 팍스의 사건 속에 담긴 교훈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영어를 배우기 위한 하나의 매개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나 윤리 과목은 다르다. 그 사건 속에 들어나는 정의나 진실이 곧 교육목표인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을 학생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강행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학습목표로 제시된 제대로 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교육은 학생들의 가슴에 그런 정의적 심성을 새겨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흘러간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교육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최근 교육계에서 횡행하는 일련의 부정부패 사건들도 따지고 보면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목격하고도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일들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요, 어린 새싹들을 키우는 일이라면 자라나는 아이들의 입과 정신을 막아 놓았으니 이미 우리의 미래는 싹수가 노랗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통탄할 일인데도 우리 교육계는 반성이나 번민의 기색조차 없다. 그러기는커녕 지난 해 겨우 바로잡아 놓은 0교시 수업 부활을 전면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아침을 먹지 못한 채 학교에 와서 잠을 자는 잘못된 학교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애써 8시 30분으로 늦추어놓은 등교시간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8시 이전으로 냉큼 다시 돌려놓은 학교가 대다수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나이는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이다. 나무로 치자면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실가지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아침 8시가 채 못 되어 학교 정문을 통과하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나올 수 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세상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면서도 아무도 "싫어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입이 없고 자기 열매가 없는 아이들로 죽어가고 있다.

아이들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키우려면 그들에게 거부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제적 자율학습'이라는 모순 형용의 병든 말들이 학교사회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누구보다도 우리 교사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모순 된 미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나라의 근간인 미래의 꿈나무들을 노예로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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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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