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50회

등록 2005.03.30 07:59수정 2005.09.1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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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에 시립해 있는 하녀 두 명은 공손하게 두 손을 복부에 모은 채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서가화와 송하령이 들어섰음에도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을 것이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을 것이었다. 그녀들의 움직임은 오직 눈동자 하나였다. 그녀들의 눈에는 다급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고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서가화는 무심코 그녀들을 지나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방안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음을 알았다. 그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급히 한쪽 탁자에 놓인 검을 찾아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탁자 위에 놓여져 있어야 할 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쪽 귀퉁이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검을 찾는 것이오?”

그녀의 눈에 흑의를 걸치고 의자에 앉아 있는 피부가 유독 검은색을 띤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빙긋이 웃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이는 마치 흰 선을 그어 놓은 듯 보였다. 그리고 위맹한 사십대의 장한 두 명이 앉아 있는 그의 뒤로 공손히 서 있었다.

내자불선(來者不善) 선자불래(善者不來)라. 분명 이들이 좋은 뜻으로 오지 않았으리라. 여자의 몸으로 항상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여 고모집에 온 이후로 항상 탁자 위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다.

“왠놈들이냐? 감히 해가 진 시각에 처자의 방을 기웃거리는 놈들이니 분명 잘못된 생각을 머리 속에 담고 사는 놈들이 분명하렷다! 혼을 내주기 전에 빨리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서가화의 나무라는 모습은 서릿발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장군가의 여식다운 위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내가 좀도둑이나 화화공자(花花公子:바람둥이)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사내에게는 아랫사람을 부려왔던 태도나 풍모가 보이고 있었다. 또한 무언가 알 수 없는 완강한 느낌이 그녀를 위축시켰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가화가 나무란다고 일어 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중히 서가화와 송화령을 번갈아 보며 포권을 취했다.

“무명소졸 등자후(鄧玆厚)라 하오. 두 소저께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소이다.”


그의 태도는 대인(大人)다웠다. 그러나 서가화가 느낀 것은 위압감이었다. 앉아 있을 때에도 느꼈지만 일어나 있으니 전신을 붙잡아 매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볼 일이 있다면 백주 대낮에 명첩(名帖)을 보내 고할 일이지 이 저녁에 찾아 온 것은 무례한 일이 아니냐!”

그녀의 목소리는 뾰쪽했다. 자꾸 위축되는 마음을 떨쳐버리려 그러하였지만 그녀의 말투는 조금 전과 달리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 한 가지 이유로 초조해졌다. 이렇듯 자신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면 이곳이 아무리 별원(別院)이라 하더라도 호위무사들이라도 들이 닥쳐야 옳았다. 하지만 그런 기척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명첩을 보낸다고 두 소저께서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실 명첩을 보내 만나야 할 일이 아니다 보니 이런 결례를 범하게 되었소.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서소저는 되도록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소. 그렇다고 이곳에 올 사람도 없을 것이니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저음이었고 듣기 편안한 음성이었다. 서가화의 뒤에 서있던 송하령이 물었다.

“그 볼 일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일단은 상대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상대의 의도를 알면 그에 따라 대처할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순서였다. 등자후는 다시 싱긋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보냈다.

“우리는 저기 서 있는 하녀 둘을 포함해서 일곱명을 잠시 점혈(點穴)하였소. 하지만 그들의 손끝 하나 상하게 한 것은 없소. 하지만 누군가가 이곳으로 몰려오고 또한 일이 시끄럽게 된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오. 물론 관석당 어른을 포함해서 말이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게했다.

“감히 위협을 하는 것이냐?”

서가화가 호통을 치자 등자후는 얼굴을 굳혔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서가화의 검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검은 허공에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서가화의 손으로 다가갔다. 물건을 던질 때 아주 빠르거나 아주 느린 경우는 한가지다. 그것은 상대가 그 물체에 자신의 공력을 담았다는 것이고, 그런 경우 아주 빠른 것보다 아주 느린 경우가 훨씬 위험했다.

“시험해 보겠다면 해도 좋소. 다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오.”

하지만 서가화는 당장 눈물을 흘릴지라도 참는 성격이 아니다. 그녀는 검을 받아듬과 동시에 쾌속하게 등자후의 전신을 노리며 뻗어갔다. 검화가 허공을 수놓으며 빛살처럼 빠른 검기가 사방을 난무했다. 무림의 일절(一節)로 알려진 아미의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이었다. 빠르고 표흘한 것이 특징인 아미의 독문검법은 상대가 어느 것이 실초이고 어느 것이 허초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만들어 위맹한 맛은 다소 떨어지지만 날카롭고 섬세했다.

사사사---삭---

공기를 가르는 검날은 마치 독사의 혀처럼 등자후의 전신을 갈라놓을 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등자후는 바닥에서 두발을 떼지 않은 채 몸을 좌우로 눕히며 그녀의 공격을 피하면서 맨 손으로 그녀의 검날 사이로 파고들었다. 서가화의 신형이 허공에서 두 번의 회전을 거듭했다. 비록 맨 손이었지만 그의 공격은 날카로웠고, 서가화는 아무런 득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재차 검화를 피워내며 연속적으로 삼검(三劍)을 찌르며 공격해 가다가 갑자기 검기를 변화시키며 두 다리를 노리며 베어갔다. 그것은 두 발을 지면에 떼지 않고 있는 그의 만용에 대한 응징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적절한 공격이기도 했다.

“적하신니(赤霞神尼)가 검의 요체(要諦)를 깨닫도록 가르쳤다니 놀랍군.”

등자후는 나직이 뇌까렸다. 거기에는 다소나마 감탄이 섞여 있었다. 사실 구파일방이나 무림문파는 세도가의 자제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상승무공을 배우는데 필요한 시간과 인내심이 없었다. 또한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생색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비전지기를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서가화가 이미 검을 알고, 난해한 난피풍검법을 운용할 정도가 되었다면 적하신니가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자후는 여유가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공을 익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와 덕목을 갖추기 위해서 무공을 익힌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는 이제 끝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전하게 마음까지 굴복시켜야 일이 쉬울 터였다. 그는 베어오는 검날을 피해 한걸음 물러나는가 싶더니 바로 앞으로 다가들며 가로지르는 검날을 잡아챘다.

서가화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베어지는 검날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손을 잘라달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쓸어가던 자신의 기세는 어느 순간 멈추었고, 검날은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쯤 구부러진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검날이 끼어 있었고 그것으로 그녀의 움직임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날을 잡은 사람보다 검자루를 잡은 사람이 훨씬 적은 힘으로 비틀거나 당기기 쉽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일은 여기에서 통하지 않았다. 검은 마치 바위에 꽂혀있는 것과 같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가화가 힘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검이오. 부러뜨리고 싶지 않다면 놓는 것이 좋소.”

서가화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강한 자다. 강하다고 느껴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몇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검이 상대에게 잡힌 것이다. 그녀는 검에서 손을 떼었다.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였다.

“무엇을 원하느냐?”

서가화의 말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자칫 시끄럽게 되면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상대에게는 있었다. 더구나 그 뿐 아니라 그 뒤에 서있는 자들도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구려. 본인이 원하는 것은 두 분 소저가 잠시… 뭐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오, 얼마 간 그곳으로 모실까 하오.”

“우리를 납치하겠다는 것이냐?”

“굳이 험악한 표현을 쓴다면 그 말이 적합하오. 하지만 약속하건데 두 분 소저의 몸에는 털끝 하나 건들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고모부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종래에는 관부(官府)에서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들이 사라진다면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송가에 그렇다 하지만 서장군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에게 납치가 되었다면 관석당으로서는 필사적으로 찾을 것이다. 하지만 등자후는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정도를 두려워했다면 아예 오지를 않았소. 조용히 가 주시겠소? 아니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인멸구(殺人滅口)하고, 부득이 두 분 소저의 청신(淸身)에 본인의 손이 닿는 것이 좋겠소?”

반항하면 부득불 점혈을 할 것이고,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송하령은 소리 없이 탄식을 터트렸다. 이 자들이 자신들을 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나 철저한 자들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이미 문 앞을 막고 서있는 다섯명의 인물을 보았다. 이들 뿐만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 자는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인물로 보였다. 이미 몸을 빼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녀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잠시 시간은 줄 수 있겠지요?”

여인네들이란 움직일 때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많이 필요하다. 등자후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빠지직---

세치는 될 듯한 탁자가 부서지며 내리 앉았다. 그 위에 서가화의 검을 던져 놓고는 씨익 웃었다.

“최소한 그냥 모셔갔다고 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소. 누군가가 납치해 갔다고 확실하게 증거를 남겨두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래야 관석당 어른도 변명거리가 생기지 않겠소?”

송하령과 서가화는 그의 말에 더욱 더 절망감이 들었다. 이들은 치밀해도 너무나 치밀한 자들이다. 납치를 하고자 한다면 되도록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 자는 고의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더구나 관부의 조사나 서장군가의 추적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송하령은 이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에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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