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의 장경각주(藏經閣主) 광지선사(廣知禪師), 무당의 진무관주(眞武觀主) 청송자(靑松子), 화산의 파옥노군(破玉怒君) 규진(揆桭), 청성의 장로(長老)인 송풍진인(松風眞人)이 한꺼번에 움직였다면 무림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그들이 직접 노구(老軀)를 이끌고 산문을 나선 것은 예사로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대동한 문파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절정에 달한 인물들이었다.
이미 간단한 인사는 나누었다. 갈유는 풍철영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는 담천의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가 여기 왜 있는지 갈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구양휘 일행과 같이 온 것인지 물었던 것은 아마 갈인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 더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뤄야 했다.
광지선사나 달마원(達磨院) 소속의 혜광(惠光)과 혜정(惠瀞)이 담천의를 모를 바도 아니었다. 또한 청송자와 현수가 역시 담천의를 유심히 본 것은 그 이유가 태극산수에 있을 터였다. 파옥노군과 송풍진인이라 해서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궁금증은 안색이 아직도 파리한 그가 들은 것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을 거냐는 점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쑥 시험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귀한 오룡차(烏龍茶)가 식어가고 있어도 누구 하나 차에 입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실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청송자는 담천의를 힐끗 보다가 시선을 풍철영에게 돌렸다.
“청인(靑忍). 담도우께서는….”
청인은 풍철영의 도명(道名)이었다. 사실 열 살이나 더 차이가 나는 청송자와 풍철영이 같은 배분이라는 점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현장문인인 청허자와는 스무살 이상의 차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풍철영이 어린 나이에 입문을 한 탓도 있었지만, 시대적인 흐름 탓이었다. 원말에서 대명으로 넘어오는 시기는 격변기였고 수많은 제자들이 죽어갔다. 문파가 유지되지 않을 정도로 제자의 수가 줄어들고, 문파를 재건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 시기였다.
아랫대의 제자를 받을 시기도 놓쳤고, 받았다 하더라도 가르칠만한 윗대의 인물도 부족했다. 그 이유 하나로 그들은 그 동안 엄격하게 관리했던 진산비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먼저 입문한 사형이 사제를 가르쳤고, 같이 배우고 같이 익혔다. 비단 무당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파가 그러했다. 그 때문에 현임 장문인들은 벌써 은거에 들어갈 나이가 지났음에도 아직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담소제는 외인(外人)이 아니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청송자가 조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천리길을 마다않고 이곳에 달려 온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외인이 있다는 것은 말을 꺼내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의미를 안 풍철영이 나이가 이십수년이나 차이가 있는 담천의를 ‘소제’라 칭한 것은 아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였다.
다른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갈유 마저도 의혹스런 기색을 나타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캐기에는 현재 닥친 상황이 여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급하게 물어 볼 사안이 있었고,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야할 일이 있었다.
“정말 확실한 것이외까?”
파옥노군 규진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묻고 싶었던 것을 참고 있었다는 것은 금족령이 내려져 있던 이십년의 수양이 그만큼 그의 급한 성격을 다듬었다는 뜻도 된다. 그의 물음에 풍철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확실할 거외다.”
풍철영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지간한 확신이 없으면 보일 수 없는 태도. 그것을 본 청송자가 탄식을 터트렸다.
“으… 음… 분명 그 맥은 끊어졌을 터인데 어찌된 일일꼬?”
청송자의 등에는 한자루 보잘것없는 검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오래되어 보이는 그 한자루의 검은 무당을 나타내는 송문고검(松紋古劍)이었고, 그것은 선명한 행황색(杏黃色)의 수를 매달고 있었다. 그런 검은 무당에 오직 일곱자루만이 있었고, 최고 배분의 인물로서 무당의 검을 마음에 담은 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속가제자들은 아무리 배분이 높고 무공이 고절해도 그 검을 가질 수 없었다.
“이미 세상에 나타났던 것이라면 다시 나타나지 못할 것도 없지.”
침음성과 함께 파옥노군 규진이 뇌까렸다. 이마가 좁고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어 급한 성격임은 이미 외모로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악(惡)은 악(惡)일 뿐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단호하게 악을 뿌리 뽑지 않는다면 언제나 독버섯처럼 자라날 것이고 그것은 선(善)을 악으로 물들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항상 말했다.
그의 검은 그래서 추호도 용서가 없었고,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오죽하면 파문하는 대신 금족령을 내렸을까? 하지만 이십년만에 나온 중원에 대한 감회는 새삼스러웠지만 이미 공명이나 물욕은 버린지 오래였다. 청송자는 잠시 파옥노군을 바라보다 다시 풍철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풍(靑風)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
청풍은 풍철한의 도명(道名)으로 청송자에게 있어 풍철한은 제자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스물이 넘을 즈음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 꼬마인 풍철한을 입문시기부터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사형제 간이라 해도 실상은 사제(師弟)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덤벙대며 사고를 치는 풍철한을 대신해서 벌을 받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정이 가는 녀석이었고, 법도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하는 청송자에게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바로 풍철한이었다.
“임시처방으로 겨우 목숨은 붙어 있지만 얼마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말을 하는 풍철영의 얼굴 가득 수심이 드리웠다. 자신의 공력을 소비해가며 목숨은 붙여놓고 있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시선이 괴의 갈유에게로 향했다. 이제 유일한 희망이라곤 갈유의 처방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갈유는 이들의 대화에서 무척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풍장주. 일단 보아야 할 것 같소.”
갈유는 일단 상세가 어떤지 보아야 했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데 풍철한의 상세는 예상보다 더욱 위중한 상태인 듯 했다. 보기 전에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른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온 것은 바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총관인 조국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주. 개방의 홍칠공(洪七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서 모시게.”
풍철영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홍칠공 노육과 같은 전대 인물을 앉아서 맞을 수는 없다. 그가 문에 다다르기 전에 문이 열리며 노육이 들어섰다. 건들면 터져버릴 듯한 그의 코가 유난히 빨갛게 보였다. 풍철영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홍칠공께서는 점점 젊어지시는 것 같소이다.”
“별 말을… 풍장주야 말로 점점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을 보이시니 백년 뒤쯤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실 분 같은데….”
말은 그럴싸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말이었다. 우화등선이야 도인이라면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였지만 결국 죽는다는 말이다. 백년 뒤 죽을 것이라는 의미로 오래 살 것이란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도(道)를 깨치려면 백년이나 걸릴 것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풍철영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그 말에 노육은 광지선사를 비롯 각 파의 인물들과 분분히 인사를 나누었다. 배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어른일 수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풍철영의 옆에 앉아있는 담천의를 바라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만복(萬福)을 받을 젊은이가 여기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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